가만히 있어도 계절은 저만치 건너가고,
아무 말 없어도 하루는 저물어간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은 채
앞으로만 흐른다.
언젠가부터
외우지 않아도 손에 잡혔던 전화번호들은
이제 의미 없는 숫자 배열이 되었고,
사진 속 웃고 있는 얼굴들은
점점 희미한 풍경처럼 바래져 간다.
붙잡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물가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잃어버린 틈 사이에
진짜 내 시간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놓치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알게 되고,
익숙함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깊은 온도였는지 깨닫는다.
세월은
무언가를 빠르게 빼앗기보다,
느릿하게 스미며 가르친다.
아프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모든 건 변한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무뎌지고,
조금씩 단단해진다.
오늘도 서서히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 한켠에 작은 작별을 접어 넣는다.
아주 조용한,
그리운 안녕 하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