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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기쁨을 느끼는 삶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by 바리데기

빈센트 반 고흐전을 보고 왔다.

인정도 사랑도 받지 못해 외로웠던 삶.

모두들 그 마음에 공감하는 것일까?

수많은 인파들이 그의 그림들을 둘러싸고 있다.

자신들의 초라한 삶이

반 고흐로 인해 특별해지길

갈망하는 듯 보였다.


3일간 크게 앓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체했고 토했고 두통이 지속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두통이 오면 죽음을 갈망하게 된다.

죽음으로 인한 고통의 초월을.

듣는 약이 있다면 뭐라도 집어먹을 것만 같다.

이런 때는 불법 약물과 마약을 하는 이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가 간다.

분명 선행하고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고통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새날이 밝았다.

언제나 그렇듯 두통이 가시고

건강을 되찾은 날은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 든다.


두통으로 인해 한껏 경험한 우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일상에 감사하게 된다.


그런 장점이 있으니 두통이 좋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지만

유전성으로 오는 장트러블과 두통을

내내 안고 살아가야한다면

죽음 밖에 택할 것이 없을 텐데

회복의 기쁨이 고통을 잊고 또 다시 살아가게 한다.


늦잠을 잤고

밝고 경쾌한 가사없는 음악을 틀었다.

맨몸 운동을 했고

어렸을 적 고무줄을 하던 리듬으로 나풀나풀 뛰었다.

사과,오렌지,당근을 갈아먹었고

따뜻한 라떼 한잔을 내렸다.

강아지를 품에 안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초라함이란

타인의 시선에 있다.

나는 강아지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나의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그런 나를 타인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가 웃음짓고 있어

다시 내가 웃음 짓고

내가 행복하게 춤추기에

앉아있어도 가슴이 들썩인다.


귓가에는 멜로디가 들리고

맑은 뇌롤 같이 흥얼거린다.


이 행복이 누군가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


나의 아픔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나의 기쁨으로 그 사람의 기쁨을 기뻐하고 싶다.


그런 보통의 하루하루들이 쌓여

슬픔으로 빚은 기쁨이 된다면

잘 살았다 생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자유를 얻는

아무도 모르게 들이닥칠 그 어느 날이 두렵지 않기를.


그 날을 너무 갈망할 고통이 오더라도

이 날을 기억할 수 있길.

그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초월되길

마음 속으로 기도해본다.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친구들을

조용히 웃으며

잘가라고 수고했다고

나는 너를 이해하노라

인사해본다.


안녕. 친구들.

안녕. 새 아침. 새 날.

안녕.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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