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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Feb 16. 2023

풍요하리의 바느질 도감 - 20

힘든시기를 견디게 해준 파우치와 북커버 (feat. 성당굿즈)

언니 하리가 공방을 차리기 전, 긴 터널 같은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치여 만신창이가 된 하리는 회사를 나와서 오랜 기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을 이어갔다고 한다. 평소 좋아하던 장난감을 모아 보기도 하고 식물도 마음껏 키우면서 그간 챙기지 못했던 몸과 마음 건강을 생각하고 긴 쉼의 기간을 가지기도 했다. 언니는 이 시기가 암흑기라고 이야기하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바라본 언니의 이 시기는 인생에 꼭 한 번쯤은 겪어내야 할 시련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살아가다 보면 아주 크게 넘어질 때도 있고 그 상태로 괜찮아질 때까지 못 일어날 때도 있는 거니까. 누구나 겪고 나도 겪었던 그런 시기여서 그런지 백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종교는 언니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신앙활동을 하는 언니는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의 신념을 알아가기 위해 종교활동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언니에게 종교 관련 작품을 만드는 일은 재미를 주는 활동이 되었다. 시장에서 구입한 탄생석으로 묵주를 만들기도 하고 예쁜 미사보를 구입해서 착용하기도 했다. 종교활동을 하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예쁜 성물들이 참 많았다. 언니가 만든 것 중에서 유달리 탐이 나서 나도 만들어달라고 조른 작품이 있다. 아까워서 쓰지는 못하고 보관만 하고 있는 파우치와 언니의 기도 관련 책을 감싸고 있는 북커버이다.



이 작품과 관련한 사진을 찾기 위해 클라우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요즘 바느질 도감 시리즈를 적느라 클라우드를 제 집 드나들듯 들락날락하다 보니 잊어버렸던 추억이 소환되기도 하고 잊고 싶었던 악몽들도 함께 떠오른다. 이 작품은 풍요하리의 아주 초창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회사를 다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겨우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1기 작업실에서 만든 것으로 추청 되는데 당시 만든 것임에도 정교함은 여전하다.


우선 파우치는 단순히 미사보만을 담기 위한 용도에 그치지 않는다. 똑딱이를 열어 뚜껑을 열면 배색이 잘 어울리는 지퍼가 있다. 지퍼 안의 주머니에는 기도할 때 필요한 묵주가 담겨 있다. 처음에는 목걸이인 줄 알아서 머리에 넣어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묵주는 구슬 하나에 한 가지 기도가 이어진다고 한다. 해본 적은 없으나 하나씩 기도하며 구슬을 세어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용도의 묵주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지퍼 주머니 뒤쪽에는 가장 큰 주머니가 있는데 뚜껑 안 쪽 플라워 패턴 원단과 연결되어 있어서 꽃밭에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망사와 레이스 소재로 만들어진 연약한 미사보를 이곳에다가 고이 접어 담아두면 된다. 이 파우치 하나만으로도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번외로 만들어진 북커버는 기도할 때 도움을 받는 책을 감싸는 도구인데, 이 책이 표지가 얇은 편에 속해서 찢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도톰하고 튼튼한 북커버를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들은 천사, 꽃, 아이와 같은 패턴이 들어가 빈티지하면서도 은은한 색감의 원단이기 때문에 사용할 목적과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다. 나는 파우치만 가지고 있는데 지금 보니 언니에게 북커버도 만들어 달라고 졸랐어야 했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겪으며 끊임없이 좌절하는 것이 인생이고 그 시기가 되면 빨리 지나가고 싶어 안간힘을 쓴다. 그럼에도 그 시기를 지내고 난 뒤 ‘그때 힘들었어도 이런 것들을 배웠지.’라며 떠올릴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지금이라고 해도 드라마틱하게 더 나아진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보다 언니를 더 많이 알고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창작해 낸 많은 작품들을 되새길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다. 그만한 가치가 있던 시간인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이 터널 속을 언니와 함께 지나올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터널 속을 걷고 걸어 우리만의 빛을 만날 것이다. 비 종교인의 시각에서 쓴 부분이라 완벽한 내용을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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