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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Oct 15. 2020

학창 시절의 로망 수채화, 다 커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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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날씨에 교복을 단정히 입은 나는 검은색 화판을 들고 문을 나선다. 낯선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나무와 고궁이 자리 잡은 공원. 교복 입은 학생들이 바리바리 미술 도구를 싸 들고 선생님의 안내를 받고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지바른 곳에 돗자리를 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오늘의 재료는 수채화다. 이럴 거면 언니한테 수채화 좀 배워오는 건데, 종이가 일렁이며 원하지 않는 물결을 만들어낸다. 나뭇잎은 어찌나 색이 다양한지 내 눈에 비친 색을 도화지에 모두 담으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그림은 엉망이 되어간다. 역시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이번 사생대회도 꽝이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지만, 아마 다들 이런 경험은 한 번쯤 있지 않을까 한다. 무거운 화판에 철제 팔레트를 넣고 소풍 아닌 사생대회를 갔던 기억, 그리고 억지로 그림을 그렸던 것까지. 아주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림 그리기가 싫었을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째로 자연물은 초보자가 그리기 어렵다. 거기에다가 고난도 수채화로 그려야 한다. 또한, 일반 도화지에 물 많이 머금은 수채화를 그리려고 한 내 잘못도 있다. 장비 탓을 하는 것 같지만 수채화를 그려보니 장비는 정말로 중요하다. 특히 종이는 더더욱 좋은 걸 써야 한다.     


  그 뒤로 수채화는 로망 같은 존재였다. 그림을 정말 잘 그리고 특출 난 재능이 있어야 그릴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림을 막 그리기 시작했을 때에도 수채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정도 수준이 못 되기 때문에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 사용한 재료는 색연필이었다. 색연필도 여러 번 사들여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찾았다. 결국에는 그림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면서 강사님이 추천해준 유성 색연필을 샀다. 국민 색연필인 ‘프리즈마 유성 색연필’이다. 과거에는 가격이 아주 비쌌다고 들었다. 요즘에는 할인도 많이 해서 가격대가 다른 전문가용 색연필보다 저렴한 편이다. 총 150색으로 낱개 색을 살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그 뒤로 그림책 삽화 전부를 색연필로 완성했다. 


  물론 색연필도 질 좋은 재료였지만, 뭔가 색다른 게 필요했다. 그때 감사하게도 지인에게 수채화 물감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선물을 받은 뒤 새로운 재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바로 사용하지 못했다. 뜸 들이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물감을 사용했고 이내 감동했다. 이렇게 예쁜 색감은 처음이었다. 나도 수채화로 그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해졌다. 이 역시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망이 실현됐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 뒤로 수채화 그림을 더 자주 그렸다. 예전 다른 재료를 익혔을 때처럼 그림책을 따라 그리기도 했고 책을 보며 방법을 익혔다. 유튜브 채널에도 좋은 강의가 많았다. 무료로 양질의 강의를 배울 수 있다. 배운 기법을 내 그림에 응용해보는 시간이 좋았다. 한 단계씩 발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반년, 이제는 원하는 느낌의 캐릭터 원화를 그릴 수 있게 됐다. 여전히 부족한 그림일 수도 있지만, 내 진심을 담은 그림 한 점이 완성되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다.

 

[그림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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