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인생에도 있다면
절전, 시스템 종료, 다시 시작이 그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중에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보통은 다시 시작을 선택하게 된다. 일을 다 마치거나 당분간 다시 컴퓨터를 사용할 일이 없다면, 시스템 종료를 선택하겠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어서 다시 일을 하고 싶다면, ‘다시 시작’이다.
사람이든 회사든 언제든지 다시 시작 버튼을 눌러 그야말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나 꼬여 버린 인간관계, 이미 뱉어버린 잘못된 말들, 피로가 너무 누적된 나의 마음 상태, 더 이상 정리할 공간이 없는 내 머릿속…, 램에 너무 많은 계산 거리들이 상주해서, 램이 부족하고, CPU는 과열되고, 그래픽이 버벅 거리고 있는 컴퓨터와 같은 상황에 과감하게 누를 수 있는 ‘다시 시작’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이 아닌 조직이라면, 비효율적이나 너무 오래된 관행, 서로 무책임하게 바라만 보는 그러나 사실은 중요한 현안 들, 어떻게 해서 아직 망하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는 프로젝트, 조직 구성원 간의 깊이 쌓인 감정적 담의 존재, 너무 이상적인 회사를 생각하시는 대표님의 마인드,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도저히 답을 찾기 어려운 상황일 때, 전체가 점점 느려지고 과열되고, 과부하가 돼서 언젠가 멈출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가올 때…
이때! ‘다시 시작’ 버튼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시작은 상주하고 있는 많은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준다. 그런데 실제로 많이 경험하듯, 다시 시작을 위해서는 작업 중이었던 파일들을 저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애써 작업해 놓은 것들이 다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해놓은 작업 중에는 부정적인 결과물만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어려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잘해놓은 긍정적인 결과물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 자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고 0의 상태로 만들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꽤나 ‘다시 시작’의 효과를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첫 직장을 6년즘 다니다가 ‘퇴사’를 하게 되었다. 다들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충 둘러 대긴 했는데, 사실 계획이 뚜렿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이유로 꼬여 있는 나의 내면의 ‘분주함’을 ‘다시 시작’ 버튼을 눌러서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1년여의 바쁘고 한가한 백수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다시 시작’의 기간 동안 기록을 하고, 기록을 정리하는 시간에 나의 에너지가 꽤나 할당이 되었었다. 그것은 ‘다시 시작’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작업인 파일의 저장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조직의 다시 시작은 보다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다. 전문분야도 아니고 함부로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업 중인 파일의 저장에 해당하는 것이 개인보다도 훨씬 중요한 건 분명하다. 간혹 컴퓨터도 ‘다시 시작’을 분명히 눌렀지만, 다시 시작이 안되고, ‘시스템 종료’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윈도우 라는 소프트웨어의 안정성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컴퓨터도 분명 적지 않은 변수를 가진 복합 조직이다 보니, ‘예기치 않은 오류’로 인한 종료에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 회사 같은 큰 조직은 함부로 ‘다시 시작’의 의미를 가진 대대적인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권자들이 자신 스스로를 ‘다시 시작’ 한다면,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후반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염려가, 두려움이 마음 한쪽에 쌓이고 있다. 더 이상은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 ‘한 번쯤 정리를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조용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후반전을 멋지게 ‘다시 시작’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작업 중인 파일을 저장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작업들이 어떤지도 살펴보고 저장하고, 폴더를 만들어 분류하고, 하드 디스크의 용량은 충분한지도 살펴보고, 전원이 잘 공급되고 있는지도 살펴보고, 교체해야 할 노후한 부품도 살펴본다.
여기저기 낡은 가치관과 뻑뻑한 생각들이 쌓여 있고, 정리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기만 한 지식들이 지혜로 거듭나지 못한 채 마치 서재의 읽다만 책들처럼 먼지만 쌓여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씩 하나씩 저장하고, 삭제하고, 분류하고, 교체한다.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되기 직전 ‘다시 시작’ 버튼을 눌러서 마치 방금 조립한 컴퓨터처럼 왕성한 처리 속도와 퍼포먼스를 내고 싶다. ‘작업 중인 파일의 저장’으로 글쓰기만큼 효과적인 것이 또 있을까? 오늘도 이것저것 끄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