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과 마무리의 무게감 차이
설거지가 많이 쌓여 있어서 아내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리고 혼났다. 억울하다. 문제는 설거지가 아닌 뒷정리 때문이었다.
'설거지를 했으면 뒷정리를 잘해놔야지. 이러려면 하지 말아요'
나는 도와주려고 정말 열심히 했고, 평소 아내의 설거지 루틴을 관찰한 바를 반영해서, 뜨거운 물로 이렇게 저렇게, 음식물 쓰레기는 이렇게, 씻고 난 그릇은 저렇게 정리하기까지 다 했다.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 그럼 앞으로 안 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런 말은 넣어두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설거지의 프로세스를 분석해본다.
1. 그릇을 잘 적재하고 물에 잘 담가 두는 '준비 단계'
2. 실제로 설거지를 '수행하는 단계'
3. 설거지 후 그릇과 작업공간인 싱크대를 '정돈하는 단계'
각 단계마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예를 들어 1단계인 준비 단계에서, 기름기 있는 그릇은 겹쳐 두지 않는 것이나 밥풀 같이 굳어 있는 음식 물은 물에 불려 두는 것이 해당한다. 설거지 수행 단계는 당연히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된 정돈 하는 단계인 뒷정리는 아무래도 일의 중요도가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뒷정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설거지를 다 완료했다는 마음, 이미 일이 다 끝나 있는 그 느낌으로 무언가 더 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 봐야 싱크대를 잘 정리하지 않은 것, 도구를 정리하지 않은 것 정도인데. 이게 다음부터 설거지를 하지 못할 사유가 되나? 그렇게 중요한가? 억울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뒷정리 만으로 나의 모든 설거지 프로세스를 평가하다니 너무하다.
프로젝트 위주로 일을 하다 보니 반복되는 프로세스가 있다.
1. 기획하고 고객에게 제안하는 단계
2. 연구를 위한 업무를 분배하고 수행해가는 단계
3. 결과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단계
솔직히 어떤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차가 얼마 안 되던 시절에는 주로 업무를 분배당하고, 수행해가는 단계에 몰입되어 있었다. 좋은 연구 결과들이 나오기 위해 고민하고,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시도와 그에 따른 시간의 투입, 멘탈의 투입으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의 핵심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바로 '나'라는 생각이 컸다. 자연스럽게 기획단계의 일을 한 사람과 정리하는 단계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불만도 쌓였다.
'아니 기획을 왜 이렇게 해서 이런 어려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온 거야? 돈 되면 무조건 하려고 하니까 실무자들만 죽어 나지'
'내가 고생해서 만든 결과물들을, 저 사람이 정리하면서 너무 간단하게 나온 것처럼 만들어 버렸어.'
결국에는
'내가 기획을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내가 정리하면 저것보다 훨씬 괜찮은 보고서가 될 텐데'라는 불만들로 수렴했었다. 요즘은 라떼 타령하기도 쉽지 않고, 먼가 모를 '변화'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프로젝트의 결과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단계만큼은 경험치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가 단발성이 아닌 연속성을 갖게 만들고, 성과물의 가치를 극대화하려고 한다면, 여러 가지 경험이 필요하다.
프로젝트의 마무리는 보통 프로젝트 기획과 제안을 한 사람이 할 때가 많을 것이다. 왜냐면 고객과 처음부터 협의하고 구상한 목표가 있었고, 그것을 잘 수행한 성과물을 가져다 주기로 약속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그래서 고객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실무자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해도 실무자의 취향을 존중한 결과물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다음을 보장하지 못하는 일이다.
한 번은 너무 바쁜 나머지, 프로젝트의 뒷정리를 경력이 1년이 채 안된 직원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지 못한 채 바쁜 일정에 쫓겨 마감을 부랴부랴 했다. 그 결과, 해당 고객과는 이제 다시 일을 못하고 있다. 심지어 죄송하다는 말을 하러 찾아가 봬야 하기까지 했다. 직원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경험치로는 어떤 부분이 중요하고, 어떤 부분이 고객이 원하는 것인지 다 이해하고 있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구체적인 가이드를 해준 것도 아니었다. 결국 뒷정리라는 것을 하지 않은 프로젝트 책임자의 잘못이다. 책임자는 나였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결국 뒷정리는 중요하고, 섬세하고, 다음을 위한 투자로서 가치 있는 일이었다. 고객과의 중요한 약속이다. 그러니까...
설거지는 뒷정리까지 잘해야 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