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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 인생

by 글치

느려도 되는 인생

‘무엇’이 되느냐 보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만큼 어떤 삶이냐 보다 무엇이 되느냐에 치우칠 가능성이 높아서이다. 요즘은 ‘언제’ 무엇이 되었는지도 많이 따진다

‘옆집 아이는 벌써 영어를 읽어요.’

‘박 과장 있지? 벌써 부장으로 특진했어!’

‘최단기에 유니콘이 된 스타트업’


어려서부터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과학자가 무언지 잘 몰랐지만, 연구하고, 만들고, 다 하는 김박사가 세상을 구하는 애니메이션이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그 후엔 ‘백 투 더 퓨처’라는 영화를 보고 과학자 중에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타임머신만큼 대단한 발명품은 없어 보였다. 미래를 가고 싶었고, 과거에 가서 부모님을 부자가 되게 하고 싶었다.

철이 들어가면서, 타임머신이고 뭐고 취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취업은 공대’라는 명제에 이끌려 공학자의 길을 시작했다. 무엇이 될까는 정해버린 셈이다. 사람들은 공학자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묻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관심 있는 것은 언제 되느냐였다.

‘아니! 자네 아직도 대학원 다니고 있나?’

하마터면 갈 뻔한 연구실의 지도 교수님을 마주쳤다. 한 달에 두 번 쉴 수 있는 일요일을 허락해주겠다는 조건의 연구실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유연한 연구실을 택했었다.

‘네 아직 학교에 있습니다’

‘자네 동기는 벌써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직했어 ‘

뭐라 대답할 말은 없었다. 열심히 하라는 말씀에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여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 후에도 몇 년을 더 학교에 있어야 했다. 나는 매우 늦게 ‘무엇’이 되었다. 특히 동기들에 비하면 아주 많이 늦었다.

거리는 속도 X 시간

시간은 늘 흐르니 속도가 0이 아니면 이동이 되고 어딘가에 가게 된다. 빨라야 할까? 방향이 중요할까? 결국에 도달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방향을 잘 잡고 방향이 맞는지 종종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속도가 빨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어디’를 입력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자체 동력이 있어서 속도 조절이 된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건다. 내비게이션을 켠다. 목적지를 입력한다. 도중에 경로를 이탈할 수도 있다. 가다가 잠시 멈추기도 하고 왔던 길을 다시 돌기도 한다. 비효율적이거나 건설적이지 못한 여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목적지가 입력되어 있으면 경로 재탐색이 자동으로 실행된다. 잘 갈 수 있을지 모르겠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으며, 운전 자체가 힘들고 자신 없어도 목적지가 있으면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 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신기한 것은 경유지 정도는 선정한다는 점이다. 수많은 경유지를 들르지만 목적지를 정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동차의 성능이 개선되어 속도가 빨라지고 효율이 높아지듯 우리 인생도 빠르게 변해간다. 목적지를 입력할 겨를도 없어 보인다. 그저 달리는 이유는 달리는 즐거움에만 집중해서인지 아니면 달리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범선은 자체 동력이 없다. 막막한 항해 길에서 속도를 맘대로 조절하기 어렵다. 바람이 불 때 그저 방향키를 잘 잡고 조종하면 배가 간다. 나는 범선 같다. 바람이 불면 그제야 바람을 따라 앞으로 갈 수 있다. 속도는 0일 때도 자주 있고, 마음껏 조절하기 힘들다. 그러나 방향은 나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방향은 목적지에 달려 있다.


한동안 목적지 없이 움직였다. 바람에 이끌려 둥둥 떠다녔다. 시간이 갈수록 움직임 자체의 의미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 안에 숨어있던 두려움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어디’라는 것을 정해도,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인생이 한 번뿐이다 보니 실패나 후회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 실패일지, 목적지가 없던 여정이 실패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졌다. ‘어디’를 향해서 가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너무 늦게 목적지를 입력한 것 같지만, 그렇게 티는 안나는 것 같다. 자체 동력은 없지만 그래도 장거리엔 범선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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