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중소기업이다. 09
어느 날 새로운 사장님이 오셨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출신이셨다. 월례회에서 첫 담화를 하셨는데, 카리스마 넘쳤다. 그리고 오자마자 비상경영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칼을 잡으셨다. 한 달이 안되어 칼을 휘둘렀다. 매일매일 누구누구가 나갔데 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다른 소식은 누군가 부서 전배가 되었다는 공지였는데, 보면 볼수록 놀라운 배치였다. 원래 주 업무와 전혀 상관없고 직급도 없는 희한한 배치들이 이뤄졌다. 전산팀 팀장이 생산라인의 베트남 아줌마들 사이에서 현장직으로 발령받기도 했다. 대부분 일주일 내에 자리를 정리하고 퇴사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다. 몇 달이 넘도록 퇴사를 하지 않고 버틴 분이다. 심지어 표정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다른 사림들의 시선이나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월례회에서 사장님은 내부적으로 조사를 해서 소통이 안되고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들이 대상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호한 설명이지만 왠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분도 그중에 한 분이었다. 암묵적으로 다들 동의한 듯한 분위기였다.
처음 입사했을 때에 비해 회사는 크게 성장했고, 그만큼 고용임원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중에는 굳어버린 고체 같은 사림들이 있었고, 회사의 어떤 유연함을 막고 내부의 흐름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예전에도 해봤지만 어렵습니다.‘
같은 의견을 주로 내는 사람들이다. 변화와 도전을 방어하는 사람들. 소수이지만 그런 존재들이 낮지 않은 직급에 있었고, 그 부분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그 후로 조금씩 막힌 혈관이 뚫리는 듯한 효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이 끝나고, 유체같이 부드럽게 흘러들어온 새로운 사원들이 보충되었다. 경험은 없지만 새로운 도전과 창의성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도 굳어있음을 느꼈다. 이제 내가 고체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과의 회의시간에
’ 그게 될까?’
라는 피드백을 하고 있었다. 된다. 해보자. 이런 말보다, 일 벌이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슬슬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