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중소기업이었다. 10
후배들이 꽤 들어왔다. 처음에는 소위 말하는 ‘자기 밥벌이’를 못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할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루틴 한 일들은 다 후배들이 가져갔고, 뭔가 새롭고 어려운 일이 생겨야 하는데, 회사의 제품군이라는 것이 한정적이어서 더 이상 새로운 분석이나 시뮬레이션을 할 거리 자체가 없었다. 거의 인터넷만 보다가 끝난 것 같은 날도 있었다. 일단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다가 회사에서도 신규 사업 분야의 개척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신사업 기획 팀이 꾸려졌다.
회사 돈으로 창업 세미나를 가기도 했다. 신사업이라는 것이 회사의 자본으로 창업을 하는 것과 유사했다. 아이템 선정이나 잠재시장분석, 기술적 우위 가능성, 경쟁사들의 상황 등을 조사했다. 아이템 선정이라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창업을 하는 사람들의 노하우나 경험을 듣고자 그런 세미나도 가게 되었다. 들을수록 내 사업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용기는 없었다.
많은 아이템을 검토했다. 그리고 보고했다. 그리고 반려당했다. 이쯤 되면 신사업 기획팀이 아니고 신사업 포기 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영진에게 어떤 아이템을 포기할지 알려드리는 팀 같았다. 결국 한 가지 아이템이 물망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사실 기획팀 내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아이템이었다. 단지 시작하기 쉽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작용했는데, 나중에 듣게 된 소식이지만, 얼마 못 가서 접었다고 한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중국의 저가 제품이 이미 좋은 품질로 시장에 풀리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아이템과 접근성이 좋다고 해서 좋은 신사업은 아니다. 시장에서의 경쟁 판도도 매우 중요하다. 또 다른 아이템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이 시장진입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접었다. 들어갔다가는 투자금이 다 날아갈 상황이 뻔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포기하다 보니, 거의 대부분을 포기했다. 그리고 나도 회사생활을 포기하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새로운 그리고 흥미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졌다.
나는 장거리 출퇴근 족이었다. 이제 자차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편도가 70km였다. 신규 도로라 한산했던 출퇴근 길은 교통량이 점점 누적되었다. 몸에도 피로가 누적되었다. 정말 위험한 일이지만, 가끔 졸음이 폭풍같이 몰려오기도 했다. 퇴근할 때는 좀 쉬다 가기도 했지만, 출근할 때는 용이치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사고가 났다. 눈이 감긴 걸 인지하고 놀라서, 눈을 떠보니 이미 승합차가 앞에 있고,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풀 브레이크 밟아도 박는다’
추돌사고를 낸 것이다. 속도가 낮았던 터라 사람이 다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앞차는 범퍼가 파손되었고, 이대로 계속 회사를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일도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던 차에 드디어 내 입 밖으로 퇴사라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했던 학위과정도 이참에 집중해서 끝내자는 명분도 있고, 사업도 구상해 보겠다는 이유도 더해서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감사하게도 내 뜻에 따라주었다.
상담에 상담을 거듭하고, 인사팀과 이야기 끝에 결정짓게 되었다. 사실 그 중간에 그래도 나가지 않겠다는 명분을 찾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입사 당시 약속받았던 ‘연구조직의 이전’에 대한 문의도 해보았다. 당시 회사 사정이 좋지도 않았고, 그런 큰 일을 추진할만한 동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안 되겠다는 대답을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이 회사가 나에게 준 것도 많고, 나가버리고 싶은 회사는 분명 아니었다. 얼마뒤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사를 완료하게 되었다.
퇴사의 이유를 요약해 보면
1. 새로운 도전의 거리가 없었다.
2. 장거리 출퇴근으로 쌓여가는 피로감
3. 학위를 마치고 새로운 시작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
4. 회사에 더 이상 플러스가 되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
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다시 백수의 길을 시작했다.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와 연구실에 책상 하나를 배정받았고, 논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지만, 첫 직장인 이 회사에서 얻은 것이 많기에 그중의 일부를 기록으로 남긴다.
사회생활의 기본기를 처음 배웠고, 현장과 실무의 힘을 배웠다.
다양한 협업,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느꼈고 지금까지도 좋은 기본 자산이 되어 주었다.
중소기업이지만(사실 지금은 중견기업이다.) 적지 않은 인원수의 조직에서의 시스템 구축과정을 지켜본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기업이 신사업을 시작하는 어려움을 이해할 기회가 있었다.
나의 사회생활 시작에 좋은 디딤돌이 되어준 회사와 동료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다.
이 이후에는 전혀 다른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바로 소프트웨어 프리세일즈라는 직군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drsales
https://brunch.co.kr/brunchbook/foreigncompany
언젠가 3개의 브런치북을 잘 엮으면 하나의 패키지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