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란 본래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신호다.
데이터를 흐리게 만들고,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
우리는 그것을 흔히 잡음이라 부른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게 들린다.
노이즈캔슬링 기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잡음이 많아진 것인지
아니면 잡음의 범위가 넓어진 것인지 헷갈린다.
내가 원치 않는 모든 소리가 잡음이라면,
잡음의 정의는 이미 바뀐 셈이다.
새로 옮긴 사무실은 어딘가 달랐다.
인테리어도, 사람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소리가 달랐다.
주파수와 데시벨.
배경에 깔린 소음의 결이 달랐다.
너무 조용한 것 같기도 했고,
묘하게 낯선 음색이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럽게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기 시작했다.
잡음이 사라지면 쾌적할 줄 알았다.
마음도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어색했다.
잡음을 없애는 일은 선별적이지 않았다.
없애고 싶은 소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들어야 할 소리,
들으면 좋은 소리,
그저 있어도 되는 소리까지 함께 지워졌다.
빛이 부족하면 사진이 흐려지듯,
소리가 부족하면 분위기도 선명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최신기기에 대한 중년의 어색함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상했다.
결국 유선 이어폰을 다시 꺼냈다.
음악 사이로 주변의 소리가 미세하게 섞여 들어왔다.
완전히 차단되지 않은 그 상태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사람의 말소리에 반응할 여지도 남아 있었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내가 가리고 싶었던 잡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어떤 소리를 잡음으로 정의하며 살아갈까.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잡음으로 규정하는 기술은
그 범위의 확장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더 잘 들린다고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소리는
잡음으로 취급되기에는 위험하다.
경고음, 마찰음,
그리고 굳이 듣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의 목소리까지.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소리를
잡음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삶의 소리,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소음들.
그 모든 것이 잡음이 된다면,
결국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잡음이 될 것이다.
그때 남게 되는 소리는 무엇일까.
문득, 그것이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