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읗이응 Jan 15. 2023

물벼락

1월 15일

일기가 아닌 조금 더 감성적인 글을 쓰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일기가 되어야겠다. 

아침에 눈을 떠 거실로 나가니, 거실이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안경을 벗으면 사물의 형태만 보이는 나는 물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거실을 밟자마자 철퍽한 감촉에 후다닥 안경을 쓰니, 거실 천장 여러 곳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밤새 무슨 일이람.

바닥이 흥건한 것을 보니 이미 물이 꽤 오래전부터 떨어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귀가 예민한 나는 요즘 집 앞에 생긴 무인세차장의 소음으로 귀마개를 끼고 잔 것이 문제였다. (새벽에 떨어지는 것을 알았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아, 무언가 대놓아 물바다가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잠을 포기했겠지. 그나마 잠이라도 잘 자서 다행인 것인지.) 원래 가끔 새벽에도 세차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하여간 이게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사태를 확인하자마자 거실에 둔 전기제품들의 전원을 처리하고, 급하게 빌라 관리인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천장에서 물이 샌다고.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물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점점 더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뭐 받쳐놓을 것도 없어서 급하게 쓰레기봉투 걷어내고 쓰레기통을 받쳐놓았다. 출근을 하려고 일어난 것이었는데....

밖에 눈이 온다며 나를 출근시켜주러 온 아빠는 갑자기 물청소를 하게 되었다. 위층의 배수관 문제로 결국 천장 공사와 벽지, 장판을 전부 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나는 공사 시기 동안 부모님이 계신 본가로 가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침실이나 옷방의 천장에 물이 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침대와 옷 위로 물이 떨어졌다면 너무 슬펐을 거라고. 아침부터 딸네 집 거실 물청소를 하며 갑자기 급발진으로 화를 내는 아빠를 조용히 달랬다. 지금 아빠 보다 화가 나는 사람은 나고, 침실이나 옷방이 아니어서 다행 아니냐고. 그다지 진정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나는 가끔 말도 안 되게 긍정적일 때가 있다. 주로 큰일이 오면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듯 지금 나쁜 생각을 하면 뭐 해.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인걸.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 하고 말이다. 오히려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는 편인데. 마감이라던가.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안 했을 경우. 그건 주로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저지른 일이고, 대부분 닥친 큰 일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라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것 같다. 명확하지 않은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을 예상하여 스트레스받는 일이란 갑자기 내일(떨어지는 순간까지 예고 없이) 운석이 떨어져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말이지. 하지만 내가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들은... 그건 온전히 내 잘못이니까 스트레스받아도 된다. 물론 가끔 남이 느려서 내 계획에 흐트러지면 그것에도 매우 비관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차피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 어느 정도 납득을 하는 편이다. 

이렇게 적어내고 보니 나는 나에게 꽤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그렇지는 않은 걸까. 글이라는 것이 이래서 좋은 것이구나 요즘 종종 느끼는 편이다. 하루의 나를 적어내려가면 몰랐던 내가 정리되기도 하고, 알았던 내가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전 편에 말한 이틀차가 되어 뭘 써야 하나 이틀은 너무 힘든 선택을 했나. 작심이틀은 조금 심한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천장의 물이 또 도와준 것인가. 괜찮은 것인가. 


이것 봐라.

대책 없다.

작가의 이전글 새해의 마음가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