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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이응 May 04. 2022

내 자랑

퇴사하기.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긴한데, 나는 일을 참 잘했다.

공부머리는 조금 덜 해도, 일 머리는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아빠 말로는 잔머리가 잘 굴러가서 그렇다고 했다.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또 인정하지 않는다. 잔머리를 굴릴만큼의 생각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이건 내가 예뻐하는 후배들에게 종종 농담처럼 했던 나의 사회생활의 팁인데, 세상에 그 어떤 회사를 다녀도 마음에 드는 상사는 없다. 그렇지만 일은 해야하기 때문에 돈은 벌어야 되기 때문에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와 말도 섞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들과 말 섞는 것을 한마디라도 줄이기 위해서 상사가 무언가 시키면 다 했냐고 물어보기 전에 그냥 일을 끝내고 줘버렸다. '다 했어?' 라는 말을 듣고 그 일을 끝내지 않았으면 왜 못했는지에 대한 변명을 해야하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상사와 말하기 싫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첫 사회생활에서 호되게 당한 후 나는 줄곧 그렇게 일했다. 

물론 부작용은 따른다. 걔는 일처리가 빠르다. 일을 잘한다. 소문이 나면 일이 나에게 부당하게 몰리는 부작용. 20대 때에는 몰려도 다 해냈다. 그게 다 나의 자산이 될 것이라고 믿었고,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포지션에 두어도 전문성이 있지는 않아도 프로세스 정도는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중소기업에 아주 적합한 인재가 되어갔다.

지금의 회사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승진도 쭉쭉 했다. 물론 그 어느 중소가 그렇듯 따라오는 직급과 업무강도와 책임만큼 연봉이 따라오지 못한다.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상황은 오고야 만다. 그리고 그만큼 사회생활의 숙련도는 높아지고 성격은 더러워진다. 주위에서 아무리 좋은 성격-이건 사회생활의 숙련도다.-이라고 해도 성격은 더러워진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해내는 나에게 자산이 되는 업무 역시 줄어들기 마련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일을 이것저것 하다보면 아, 뭐 대충 아니까 일단 하면 되지. 의 생각이 들면 이미 업무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진거다. 20대 땐 나에게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면 무섭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서도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위에서 할 줄 알겠다고 판단해서 준 업무니까 선택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것도 이젠 없다. 결정적으로 퇴사를 마음 먹게 된 것은 귀향을 생각한 것은 작년에 왔던 번아웃이 컸고, 아주 큰 프로젝트에 수장이 되어 결정권자 (결재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문득 실무 일선에서 벗어나 후배들이 일을 봐주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매우 재미가 없었다. 나는 늘 일선의 중심이 되었던 사람이라 한발자국 떨어져 후배들이 피땀흘리며 업무에 매진하는 것을 격려하고 책임져주고 하는 것이 뿌듯은 했지만 재미는 없었다. 나는 내 일을 해야 즐거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만일수도 있다. 오만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재미가 없는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퇴사를 마음 먹었다. 귀향을 마음 먹었다.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는데 참 난감했다. 진짜 이것저것 하고 있었구나. 내가 끌어안고 있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나의 인수인계서는 여러 부서에 걸쳐져 있었다. 쓰면서도 어이가 없고 전달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쥐꼬리같은 연봉을 받고 판교 바닥에서 아둥바둥 살았구나. 어딜가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역시 오만일 수도 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오만일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 월간 회의에서 대표가 그런 말을 했다. 만 3년 일을 하면서 회사에 공이 많다고. 기쁘지는 않았다. 이제 업무의 기쁨에는 무딘 사람이 되었나보다. 싫고 또 좋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처음 퇴사를 이야기 했을 때 대표가 연락을 해왔다. 너무너무 서운하다고. 그래서 너무너무 서운 할 일은 뭐냐고 대답했다. 마음대로 잘 움직여준 말이 없어져서 서운한 걸까. 삐딱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이사를 불러 말했다. 대표님께서 서운하다고 퇴근 후에 전화하셨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으셨으면 좋겠다. 고.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무조건 너 우선적으로 생각하라고. 네가 1등이라고. 

그렇게 살아보려니 또 얼마나 고생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설레는 마음이 들긴 하다. 이제 이틀만 출근 이라는 것을 하면 지금과는 조금 색다른 백수가 된다.


걱정이 되지만 조금 설렌다. 나는 내가 잘 됐으면 좋겠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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