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김윤아, <봄날은 간다>
봄은 꽃이 피고 사랑이 시작되는 계절로 종종 형상화된다. 모든 것이 새로 움트고 사랑스러울 것만 같은 설레는 때. 애석하게도 봄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자연의 이치 앞에 지고 변했다가 다시 돌아온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계절의 순환에 빗대 표현한다.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가 만나는 대나무밭 씬의 배경은 늦겨울, 초봄 무렵이다. 파란 대숲 속에서 서로 호감을 키우는 장면은 목도리와 파카가 어색할 정도로 따뜻하지만, 다시 돌아온 봄은 그렇지만은 않다.
상우와 은수의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90년대 감성의 연애에 놀란 부분도 있었지만 ("자고 갈래요?"가 나온 뒤 둘이 따로 자고 있길래 순수하게 '잠만 자고 가라'인 줄 알았으나 잠에서 깬 은수에게 키스하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 어느 장단에 맞출지 모르겠는 밀당 90년대) 사랑에 빠지는 건 원래 그런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생각나고, 어쩌다보니 이끌리듯 서로를 갈구하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헌신적이다. 방송국에서 수 많은 밤을 새느라 소화기 사용법을 외울 지경인 은수는 이제 일 대신 상우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서울에 사는 상우는 강릉을 밥 먹듯이 찾아온다.
은수는 상우에게 나중에 같이 묻히자고 하지만 상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후 영화에서는 사랑으로 결속된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둘의 연애를 알리고 가족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상우와 달리 은수는 망설이고 고민한다. 상우가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은수는 그 사랑이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알고 경계하는 사람이다. 둘 중 매번 찾아오는 쪽은 상우이고 직장을 포기하고 강릉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상우이다. 은수는 둘의 관계가 끝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서울로 걸음한다. 은수는 마치 겁이 많은 소라게 같다. 상대가 다가올 수록 뒷걸음질 치면서 거리를 유지하는. 다칠까봐 겁이 나서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다가 서서히 다가가는 거다. 한 번 결혼했던 여자에게 쏟아지는 편견을 감내해야 했던 시대에 은수에게 씌워진 굴레는 상우와의 사랑이 깊어지는 걸 막는다. 반면에 상우는 때 묻지 않은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고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바람을 피웠다던 할아버지를 두고 어떻게 그래, 하며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순수한 상우는 은수에게 부담스럽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았던 게 언제였던가. 은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상우가 아니라 조금은 능글하고, 자신을 한 철 데이트 상대 대하듯 하는 방송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연당한 상우는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화를 낸다. 하염없이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 나빴다, 하던 상우는 이젠 기다림이 무의미하고 미련하다고 생각한다. 남겨진 사람은 잘못했다며 찾아갔다가, 기다리다가, 화를 냈다가, 체념한다. 은수가 다시 찾은 상우는 어딘가 변해있다. 은수를 보는 눈빛엔 순수한 반짝임 대신에 원망과 혐오가 있다. 그 달라진 눈빛을 보며 은수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불쑥 찾아온 은수가 상우는 얼마나 야속했을까. 몇 달 전에 왔으면 좋았을걸, 사람의 감정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도 좋았던 건 마지막 상우의 웃음이다. 은수를 처음 만난 그 날 들었던 대숲 소리와 꼭 닮은 갈대 소리를 들으며 상우는 미소짓는다. 은수를 떠올리는 게 더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을 때, 상우는 은수를 만나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좋았던 건 90년대 감성의 화면과 말투였다. 짧은 머리에 수수하고 통이 헐렁한 바지를 입은 이영애가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니, 그랬거든, 응 그러니, 하는 그 시절 말투는 정말이지 귀엽고 순수하다. 이런 말투로 다정하게 말하는 유지태에 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시절이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어떤 향수가 있다. 아득하고 순수한,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어떤 감정. 그래서 옛날 영화가 좋다.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김윤아,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