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데 올 해 읽었던 책 중 TOP 3 안에 들어가는 책
4년제 대학 졸업자의 평균 초임이 얼마인지 아는가? ‘잡코리아’에서 2016년, 2017년 대졸 신입 초임 비교 자료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2017년 기준으로 평균 3325만 원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3300만 원 정도이다. 물론 그중에는 1억 가까이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2천만 원이 안 되게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준을 잡기 위해 모든 초봉을 다 더해 인원수로 나눠주면 평균 초임이 산출된다. 이렇게 광범위한 데이터에서 어떤 의미를 뽑아내기 위해 우리는 ‘평균’을 자주 사용한다.
내친김에 하나 더. 병역검사를 받은 남자의 출생 별 평균 키를 나타낸 자료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173cm 선에서 머문다. 나는 딱 평균 수준의 키인데, 밖에 나가서 다른 남자들과 비교를 하면 평균이라기 보다 내가 약간 작은 편이라고 느낀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나는 평균 키이기 때문에 나보다 작은 사람과 큰 사람의 수가 대략 비슷할 것이다(키는 ‘정규분포’를 따르는 대표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평균값과 중앙값이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인간은 ‘손실 회피 편향’이 있어서 비슷한 크기의 이득과 손해가 있으면 손해를 더 크게 느낀다. 키가 작은 사람과의 비교로 얻는 만족감보다 키가 큰 사람과의 비교로 얻는 열등감이 더 크다. 그래서 똑같이 비교를 하더라도 나보다 큰 사람과 비교에 더 큰 의미 부여를 하게 돼 실제보다 더 작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참고로 한 연구에 따르면 키가 작은 사람일수록 평균 수명이 긴 경향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평균’이라는 단어는 실제 의미와 약간 다르다. 평균은 자료가 어떤 성질이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도, 아예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평균은 어떤 기준선을 의미한다. 때로는 하한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소한 평균이거나 평균보다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
‘평균’이 의미를 가지려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일차원적인 데이터를 비교해야 한다. 평균을 개개인에 비교를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예컨대, 평균 키를 놓고 생각해보자. 한국 남성의 평균 키와 미국 남성의 평균 키를 비교하는 것은, 그 평균값이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한국 남성의 평균 키와 내 친구 태우의 키를 비교하는 것은 비교를 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평균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비교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도 비교를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평균주의적 사고방식’은 대체 언제 어떻게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게 된 걸까?
역사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 ‘권력’의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하지만, 인권의 관점, 종교의 관점, 총/균/쇠의 관점, 심지어 ‘모기’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평균’의 관점으로 역사적 인물을 관찰하며 ‘평균주의’가 우리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연역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인물은 아주 저명한 과학자 ‘아돌프 케틀레’이다.
케틀레는 천체물리학자였다. 천문학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케틀레는, 벨기에에서 천체물리학자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혁명이 발발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빅데이터’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과 관련된 대대적 자료가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다. 혁명에 막혀 꿈을 펼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이 빅데이터를 해석하는 일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천문학에서는 행성의 위치를 보다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 측정값을 여러 번 산출하고 그 값들의 ‘평균’을 이용해 오차를 줄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케틀레는 쏟아져 나오는 빅데이터, 즉 월별 출생아 수 및 사망자 수, 연간 수감되는 범죄자 수, 도시별 발병자 수 등의 아주 '날 것'의 데이터(raw data)를 ‘평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의미를 부여했다. 케틀레는 인간의 평균을 해석하며, 평균은 참이고 평균에서 벗어날수록 오류라고 주장했다. 평균적인 사람을 한 유형의 전형적 표본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결론이 과학적 정당성을 가지고 사회학의 토대로 자리 잡게 된다.
케틀레가 제시한 평균적 인간이라는 이 신과학이 점점 혼란이 가중돼가던 인간 통계 분야에 반가운 질서를 부여하는 듯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정형화하고 싶은 인간 본유의 충동에 정당성을 입증해줬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겠지만 케틀레의 이 개념은 들불처럼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p.56)
케틀레가 사회학에 평균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라면, 평균을 통해 인간을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 사람은 바로 '프랜시스 골턴’이다.
골턴은 평균을 최대한 향상시키려 힘쓰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고 믿었다. 골턴은 평균보다 높은 사람을 ‘우월한’사람, 평균보다 낮은 사람은 ‘열등한’사람이라 주장했다. 내가 평균 키를 가졌음에도 주변과 비교해 작다고 느끼는 것은 골턴이 ‘평균’을 ‘기준값'으로 설정한 탓이다. 골턴이 평균을 넘어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우리는 누구나 가능한 한 평균을 뛰어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골턴이 믿는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최소한 평범하거나 평범함을 뛰어넘어야 한다.
케틀레와 골턴은 평균이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이 평균을 우리 사회, 기업, 학교의 주류 원칙으로 만든 인물을 누굴까? 바로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이다.
테일러는 하버드 법대에 입학할 정도로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는 산업화 시대가 열리는 시대 시점에 있었기에 세계 제페의 꿈을 안고 곧바로 공장으로 들어간다. 케틀레는 공장이 발전하려면 ‘비효율성’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효율성을 줄이기 위해 테일러 또한 ‘평균주의’의 개념을 차용해 공장을 ‘표준화’하기 시작한다. 테일러는 공정의 모든 근로 방식을 평균치를 중심으로 표준화해버린다. 표준화의 방식은 효율성을 올리기는 하지만 개개인성은 무시된다. 모두 같은 방식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특정 공정을 완수할 “단 하나의 최선책”이 늘 있기 마련이며 그 단 하나의 최선책은 바로 표준화된 방법이었다. 테일러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하려는 근로자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p.75)
테일러가 영향을 끼친 것은 산업계 만이 아니다. 지금의 획일화된 교육도 테일러의 후예들이 ‘평균주의’를 교육계에 접목한 탓이다. 산업화의 바람을 맞아 공장은 점점 새로운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에 따라 표준화되고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노동력을 길러내는 교육이 시급했다. 테일러 주의자들은 산업체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근로자를 기르기 위해 전체 교육 시스템의 구조를 ‘평균주의’에 기반해 설계한다. 즉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평균 중심으로 표준화하기에 나선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공장식 학교교육을 받는 것은 모두 다 이 테일러와 테일러 주의자들 덕분(?)이다. 이렇게 보면 옷감을 규격화시키고 제단하고 그에 따라 자르고 맞추는 ‘테일러(재단사)’의 기원이 프레드릭 테일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처럼 궁금한 사람을 위해 미리 검색을 해 알려주자면, 재단사는 ’Tailor’이고 평균주의자는 ’Taylor’이다. ’Tailor’의 어원은 라틴어 Talea(자르다, cutting)에서 온 것으로, 테일러 씨와는 무관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평균’에 기준해 평가하는 것을 넘어 등급제를 도입해 사람을 줄 세우는 것에 일조한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 손다이크’이다. 손다이크는 테일러 주의자들이 동일한 평균적 업무에 준비되도록 동일한 평균적 교육을 받게 해주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린 학생들을 미리부터 재능에 따라 리더형, 근로자형, 교육조차 불필요한 유형으로 나누어 교육 자원을 제대로 분배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손다이크는 전형적인 재능론자였다. 재능은 타고나며 바뀌지 않고 그 재능에 맞는 자리에서 맞춤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교육관을 가졌다. 손다이크는 모든 학생을 똑같은 수준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타고난 재능 수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학교의 목표라고 봤다.
손다이크는 이런 교육관을 실현하기 위해 ‘평균’을 사용했다. 평균을 통해 표준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학생 각자의 평균편차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누가 우등생이고 누가 열등생인지 나누었다. 손다이크는 성적을 학생들의 전반적 재능을 등급화하기 위한 편리한 척도로 활용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는 성적 상위층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직업을 택하든 그 직업에서 성공할 가능성 또한 가장 높기 때문이라는 신념에 의거한 것이었다. 손다이크의 교육 정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평균적 학생에 맞춰 설계된 교육 커리큘럼 상의 수행력에 따라 분류돼 평균을 넘어서는 학생들에게는 상과 기회가 베풀어지고 뒤처지는 학생들에게는 제약과 멸시가 가해진다.
평균주의는 우리의 시야와 사고를 한 가지 프레임에 가둔다. 그리고 그런 프레임이 굉장히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것처럼 보여 이러한 제한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평균주의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수많은 평균과 비교하도록 조장하고 그 정당성을 끝없이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p.93)
이러한 ‘평균주의’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균주의의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개개인성의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껏 말해왔던 ‘평균주의’를 따르면 등급을 매기는 것이 개개인을 효율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이라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유능하거나 특출한 사람은 대부분의 일에서도 탁월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실제 이런 사고방식으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인재를 뽑고, 기업의 기준에 따라 학교도 그 기준을 사용해 교육을 할 수밖에 없다. 성적, 등급, 졸업장과 같은 단일하고 일차원적인 요소로 개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단일하고 일차원적인 요소로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은 다차원적이고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개인성의 원칙 첫 번째, ‘들쭉날쭉의 원칙’이 반박한다. 이 원칙에서는 일차원적 사고를 통해서는 복잡한 데다 ‘균일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관점을 취한다. 들쭉날쭉하다는 것은 반드시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고, 반드시 이 여러 차원들 사이에 관련성이 낮아야 한다.
‘평균주의’ 관점으로는 지능이 같은 사람은 비슷한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보자. IQ 검사에서 IQ가 103이 나온 두 여성이 있다면 이 둘은 채용시장에서 비슷한 점수가 매겨질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보라.
그림을 잘 보면 특성 점수가 비슷하게 나온 재능은 세 가지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약간 다르거나 확연하게 다르다. 단지 알기 쉽도록 ‘평균’을 내어 단순화했을 때 이 둘의 점수는 같아진다. 다차원의 재능을 단일한 숫자로 차원을 낮춤으로써 생기는 문제다. 우리의 재능이나 역량을 일차원으로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사람의 능력은 들쭉날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단일한 점수로 제약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간혹 ‘OO 성격유형검사’, ‘O 가지 성격 유형’ 같은 성격 검사를 본다. 사람의 성격을 유형별로 나누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떤 한 사람의 유형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 나누기, 즉 누가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사고 지향적인지 감성지향적인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리켜‘본질주의 사고’라고 한다. 본질주의 사고는 ‘유형화’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유형을 알면 성격과 행동을 결론지을 수 있다고 믿고, 반대로 성격과 행동을 보고 유형을 결론짓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주의 사고는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바로 ‘맥락의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정해진 기질이 있다는 사고방식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다. 인간의 정체성에 어느 정도 일관된 특징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특정 ‘맥락’ 내에서만 일관될 뿐이다.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개개인의 행동은 특정 상황과 따로 떼어서는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으며 어떤 상황의 영향은 그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과 따로 떼어서는 규명될 수 없다. 사진을 보라.
두 남자아이는 공격성 점수 평균이 같은 0.8점이다. 하지만 한 아이는 부모에 대한 공격성이 높은 한편, 남자아이에 대한 공격성은 낮았다. 다른 아이는 부모에 대한 공격성은 낮은 한편, 남자아이에 대한 공격성은 높았다. 아까처럼 ‘평균’을 내어 맥락을 제거하고 보면 두 남자아이는 같은 공격성을 띠는, 그래서 사회성이 부족하고 지도가 필요한 아이로 규정된다. 본질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두 학생은 서로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맥락을 제거하고 한 유형에 사람을 가두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내 20대 시절을 돌아보며 가장 후회되는 것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정답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사고방식, 정상적인 경로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 어떤 특정 그룹의 평균적인 일원이 따르는 길이 올바른 경로라는 사고방식이 내 인생을 제약했고 여기저기 비교하며 남들에 맞춰 살아가기 바빴다.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어떨 때 동기부여를 받는지 알아볼 기회를 빼앗겼다.‘정상적인 경로’가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규범적 사고’이다.
정상적인 성공 경로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의 전개를 이런 평균 중심적 기준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표나 직업상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정상적인 시간이 항시 대기 중인 스톱워치처럼 우리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p.184)
인간의 발달은 단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이 없다. 이는 개개인성의 세 번째 원칙인 ‘경로의 원칙’에서 근본을 이루는 토대이다. 경로의 원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확신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는 똑같은 결과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며 그 길은 저마다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과,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경로는 당신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경로가 한 가지뿐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진전을 평가하기 위해 얼마나 ‘빠른가’, ‘느린가’를 살펴봐야 한다. 내 아이가 평균보다 더 빨리 걷거나 말을 하는지, 내가 남들에 비해 수업을 더 빨리 이해하고 문제를 빨리 푸는지,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승진하는지 비교해야 한다. 경로가 고정되어 있으니 그 속도를 측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빠를수록 훌륭하다는 사고방식이 틀린 것이라면 지금의 학교 교육은 잘못해도 너무 잘못하고 있다. 정해진 수업 시간에 정해진 분량의 수업을 하고 정해진 문제를 풀어 그 점수를 평가하는 시스템은,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읽는 학생에게는 유리하지만, 그 학생 못지않게 똑똑하지만 학습 속도는 느린 학생에게는 매우 불리한 시스템이 된다. 실제 전통적인 수업방식이 아닌 학생에 따라 학습 속도를 빠르게도 느리게도 조절하면서 학습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절했을 경우 90퍼센트 이상이 수업 내용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전통적 수업방식은 20퍼센트가 수업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비슷한 비율이 형편없는 수준이고 그 나머지인 대다수 학생은 중간쯤의 수준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사회와 환경에서만 찾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도 이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나는 학창시절 그리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남들보다 이해력도 낮아 진도를 따라가기 바빴다. 그저 친구들이 공부를 하니까, 다들 수능을 위해 달려가니까 그저 맹목적으로 따라 달렸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가 좋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용하며 ‘배움’ 자체에서 흥미를 느낀다. 그런데 아직 학습의 속도는 느리다. 새로운 개념을 배울 때는 특히나 더욱 느리다. 이는 내가 절차적인 방식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학습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차근차근 진도를 따라가기 보다 나만의 속도로 이해가 될 때까지 공부를 했으면 공부에 흥미도 잃지 않고 충분히 이해를 하고 진도로 넘어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또 내가 책을 읽으며 ‘눈물 표시’까지 적어가며 읽었던 대목이 있다. 주변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그래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압박을 받으며 살았다. 나에게 유용한 길이 무엇인지, 나에게 맞는 속도는 어느 정도인지,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깨달을 시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적성에도 안 맞는 학과를 고민도 않고 선택해 9년을 방황하며 대학을 다니지 않았겠는가. 정말 이 중요한 사실을 학창시절에, 아니 적어도 20대 초반에 깨달았다면 시행착오를 덜 거쳤을 텐데! 30대 후반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깨달아 감사하며 살아가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현실이 매우 암울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교육의 본질적인 부분을 개혁해야 하고, 그 이전에 산업계에서 먼저 획일적인 채용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자는 ‘평균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근원적인 개혁은 교육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데,
- 학위가 아닌 자격증 수여
- 성적 대신 실력의 평가
- 학생들에게 교육 진로의 결정권 허용하기
이 3가지 개념이다. 이것들은 따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간단하게 말해, 4년 동안 모든 사람이 똑같이 비싼 학비를 내고 획일적인 커리큘럼을 따라 같은 수업시수를 채워야만 얻는 학위 대신, 정말 본인의 커리어에 꼭 필요한 자격증을 실력 위주의 평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의 시스템은 진로를 바꾸는 것이 리스크가 매우 큰 행동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방식은, 신경과학을 공부하며 학점을 듣다가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전과를 통해 관련 학점을 매우 긴 시간 동안 채워야 한다. 자격증 수여 방식은 유연성을 제공해 중간에 언제든 다른 분야의 프로그램으로 변경하고, 진로 시장이 요구하는 방향에 맞춰 관련 자격증을 준비할 수가 있다.
얼핏 들으면 매우 혁신적이고 훌륭한 방안 같지만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자격증이 원래 목적과 다른 식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가 토익이다. 토익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언어 본래의 기능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중점을 두고 일상생활 또는 국제업무 등에 필요한 실용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는 목적의 시험이라고 한다(토익 공식 홈페이지). 그런데 실상 토익 점수를 얻기 위한 공부를 하면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자격증도 마찬가지로 애초 목적과 다르게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자격증 따기를 위한 공부가 되어버려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외국의 사례는 잘 모르지만, 외국에 사는 몇몇 사람의 얘기를 들어봐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한다. 대학교 시험도 중간, 기말고사를 치고 나면 방학 때 다 까먹는 게 정상(?) 적인 모습 아닌가.
저자는 ‘평균주의’가 등급을 나누고, 그 등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평균주의’탓 만은 아닐 것이다. 등급을 매기고자 하는 본능은 인간의 타고난 욕구이다. 우리 개개인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나는 실력 있는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고 싶다. 실력 있는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싶다.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길 바란다. 개인도 이럴진대 기업은 어떻겠는가. 실력이 조금이라도 높은 인재를 뽑고 싶어 할 테고, 자연히 등급을 매기고 줄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된다. 기업들이 인재를 실력 위주로 뽑는다면, 암묵적으로 근로자를 양산 해내는 목적을 가진 대학도 실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 기회의 평등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것이 곧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등한 기회가 있어도 본질적으로 1등과 꼴찌는 만들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균주의’ 타파 만이 이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
저자의 주장을 전적으로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도 딱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평균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 개혁이 필요하다고도 믿는다. 획일적이고 개성을 말살하는 그런 교육, 그런 정책이 아니라 개개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자유로운 교육과 지원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경로’가 있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애덤스는 이 아메리칸드림을 당대의 물질주의에 대별되는 관점에서 논했다. “이것은 자동차와 높은 임금을 향한 꿈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향한 꿈이다. 남녀 모두 누구나 다 타고난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고 타인들로부터 출생이나 지위라는 우연에 따른 배경과 무관한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를 동경하는 꿈이다”(p.271)
인간은 인간이기에 평등하다. 인간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모두가 획일적인 기준에 맞추어 교육받고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이다. 교육계와 산업계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평균주의’를 몰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지만, 기회의 평등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평균과 비교하고 자괴감과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줄 확실한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획일화된 ‘분재’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사람을 단순화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20세기에서 끝났어야 한다. 이제는 ‘개개인성’에 주목해야 한다. 개개인에게 맞는 속도와 방법으로 기회가 주어지고,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사람을 ‘특이한 사람’ 취급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나다움’을 인정해주는 것이 더 이상 억압받고 눈치 보지 않는,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더는 평균의 시대가 강요하는 속박에 제한당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시스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개개인성을 중요시함으로써 평균주의의 독재에서 해방돼야 한다. 우리 앞에는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으며 그 시작점은 평균의 종말이다.(p.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