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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Bloomer May 30. 2020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제목을 아주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글의 내용은 그리 거창하지는 않습니다. 말 그대로 '진실'만을 말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글일 뿐입니다. 그럼 이때까지 거짓말을 해왔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정의해야 하겠군요. 제가 말하는 '진실'은 '내가 동의하는 것만 말하는 것' 입니다. 자연히 '거짓'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 되겠죠. 


 내가 동의하는 것만 말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복잡할 것 없이 아주 단순하게 '내가 동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동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 절대 굽히지 않고 그 말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동의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겠죠. 하지만 이 명제의 증명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물론 답은 금방 나올 겁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우리가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아주 당연한 것들 중에는 내 머리로 깊게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저 암기하듯 내 안에 스며들게 한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큰 희생을 치뤄가며 쟁취해낸 소중한 가치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누리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때는 맞았어도 지금은 틀린 가치들이 존재합니다. 더 나아가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 또한 존재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검증하기는 아주 긴 세월이 필요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찾기가 힘들다면 적어도 내 가치관에 비춰볼 때 확실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내 가치관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어야겠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할 때 힘이 나는지, 구체적인 안건에 대한 해결책은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 이런 것들을 머리로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직접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는 100% 알기 어렵죠. 많은 경험과 대화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교과서에서 자아성찰이라고 한다는...) 사람은 어릴 떄부터 주변을 모방하며 사회성을 기른다고 합니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부모님 또는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면 그 행동을 자제하고, 좋아하는 행동을 더 하며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하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더이상 주변 눈치를 보며 판단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그에 따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눈치만 봐서는 이런 사고력을 기르기 어렵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판단을 내려 그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확립된 가치관에 맞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정확히는 말과 그 말에 맞는 행동도 따라와야 합니다. 사실 첫 번째 단계는 20대 방황하는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 자연스레 자기 주관을 갖게 됩니다(그게 심해져서 '내 말이 다 맞다'는 꼰대가 되기도 하고). 어려운 것은 그 다음 단계죠. 그리고 제가 이루고 싶은 단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쓰레기를 버리면 안돼' 라는 데에 겉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예가 너무 단순한가요. 그럼 이런 예는 어떤가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뒷담화는 좋은 거야'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건 유치원, 초등학교 때 배우는 아주 당연한 윤리 의식 때문이죠. 하지만 뒷담화를 안 하는 사람이 있나요? 교묘하게 뒷담화가 아닌 것처럼 속이는 경우가 있지만 실상은 뒷담화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뒷담화는 거의 본능과 같은 것 같습니다. 뭐 본능인지 아닌지는 다음에 따져보도록 하고, 이제 제가 말하려는 바가 어느정도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사람들이 입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은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을요. 


 첫 번째 단계의 난이도가 10이라면 두 번째 단계의 난이도는 1000~10000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을 내뱉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쉽고 가볍지만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가벼워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내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차라리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사람들이 속으로는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 삶의 진실을 표현하며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가 힘들겠죠. 왜냐면 내가 진짜 생각하는대로 표현하면 '싸가지 없다'라는 평가를 듣기 딱 좋으니까요.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며 사람들이 대부분 (겉으로) 동의하는 말을 하며 실상은 그렇게 살지 않는 방법을 택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저 재수없는 새끼는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좋겠어'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떨어졌지만 너가 붙어서 기뻐' 라는 말을 적당히 하며 살아가는 것이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으니까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말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면 어느 순간 내 말과 행동에 괴리를 느끼고 회의감에 빠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대로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말하는대로 생각이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말의 힘은 무서운 법이죠. 내가 어떤 주장을 하는데 그 동기를 속이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때로는 나조차 속아넘어가죠.


 저는 교회에서 매 주 7년 정도 봉사를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보이려 했죠.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주된 동기는 따로 있었다는 것을 얼마 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제가 섬기는 공동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것은 동기가 아닌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동기는 공동체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 시킨 제 공을 사람들이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있고, 그런 동기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동기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나 자신까지 속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동기를 잘못 파악하면 그 동기와 현실이 충돌할 때 혼란을 겪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던 이상과 현실이 다를 때 알 수 없는 회의감에 빠져드는 것의 원인이 잘못 파악한 동기 때문인 것이죠. 이 문제의 출발은 내가 내 동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잘못 파악한 동기를 공공연히 말과 행동으로 하고 다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론적인 정치 성향을 좌와 우로 나누는 기준(경제적인 측면에서)이 있겠네요.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돈 많은 사람에게 많이 거둬 힘 없는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공평일까요, 아니면 자기가 노력해서 번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공평일까요. 이는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답이 다르게 나올 것입니다. 어느 것이 절대 선인양 말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한 개인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내 이익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합리적 선택'이 있습니다. 합리적 선택은 아까 말한대로 비난 받을 여지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동기를 '대의', '선' 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숨기고는 합니다. 처음부터 '저는 돈이 목적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속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나중에 동기가 드러났을 때 '위선자'라는 말은 듣지 않겠지요. 적어도 자신에게는 떳떳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모든 말을 진실되게 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적당한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하겠고요. 진실을 말하기 힘들다면, 때로 진실을 판단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을 속이지는 않아야 합니다. 내 말과 행동에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힘들다면 3번 거짓말 할 거 2번만 거짓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더 알기 힘들어지는 이 세상에서, '진실'의 힘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 진실이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게 할지라도 말이죠. 결국 시간이 흐르면 쭉정이는 가려집니다. 시간은 진실의 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겉으로 그럴듯한 말을 하는 사람보다, 직설적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 더 귀하고 좋더라고요.



p.s. 갑자기 어투를 반말투에서 존대로 바꾼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동안 썼던 글을 쭈욱 훑어보며, 내가 너무 단정적인 글들을 써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내가 공감하고 깊이, 오랫동안 생각한 주제도 있었지만, 그저 어디서 주워듣고 그게 마치 내 생각인 마냥 떠들었던 글도 있었습니다. 오늘 주제처럼 '진실만을 말하기' 위해서, 적어도 내가 확실히 동의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나조차 확신이 없는 주제를 말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지만, 더 논리적이고 더 설득력있는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 글을 쓰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검증한 후에 글을 쓰자 다짐했습니다.

또한 겸손함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반말투로 글을 쓰면 아무래도 좀 더 확신에 차고 단정적으로 논조가 흐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글을 쓸 때는요. 하여 내가 다 안다는 오만함을 경계하고 단정짓기를 경계하기 위한 방법으로 겸손한 말투로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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