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 김지수 작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북콘서트
“죽기 직전, 눈앞에는 인생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펼쳐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닐세.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오늘도 그 하나의 프레임으로 남으리라.
지음지교(知音之交).
부슬비에 젖듯 조용히 종자기가 된 날.
안개 자욱한 길을 뚫고 제주 서귀포로 간 덕에 ‘사람이 온다는 건’했던 정현종 사인의 시를 몇 번이고 흥얼거렸고, 글과 진심에 가물었던 가슴에 급수를 했다. 그 청량감과 달콤함은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얼굴책으로 생각을 이어오던 ‘인터스텔라‘ 김지수 작가와 만났다. 행사 전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당연한 안부를 살피고 ‘다음’을 얘기한다. 마치 마법같은, 우주 인력이다. 감탄의 영역이다.
질문하고 경청하고 쓰는..사람에서 ‘대화자’로 자신의 방향을 만든 이가 ‘입으로 말달렸던’ 선생과 나눴던 마지막 수업을 조곤조곤 풀어낸다.
“남의 머리 쫓지말고 네 생각을 해라”
“달력보는 삶 말고 지도보는 삶을 살어라”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찬란하다.
비어있고, 또 뚫려있는 ‘컵’으로 풀어낸 죽음에 대한 이어령 선생의 생각은 김 작가에 이르러 손잡이(인터페이스)의 존재를 인지하게 한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드러내고 또 남길 것인가. 그 안에서 롱스토리 인터뷰어로 교감하고 공명한 경험이 글보다 앞선 말과 다시 뒤를 받치는 글을 통해 진화한다.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어젯밤 마지막으로 마크해뒀던 글을 무대에서 보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보다 앞서 한밤중 책의 정원(서가)을 거닐다가 눈에 들어오는 책을 골라 중간부터 읽는다는 선생의 읽기에 마냥 설렜다.
‘쓰는 사람의 맥락과 읽는 사람의 맥락은 다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 콕 박힌다. 내 읽기와 닮은 것도 그랬고,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위로같았다고나 할까.
좌표와 분류로 세상을 봤던 이어령 선생의 눈으로 스스로를 밝히는 존재가 될 때까지 ‘죽음’에 천착했던 마음을 유영해 봤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했다. 비어있고 또 뚫려있는 컵으로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풀어가는 과정에 저덜로 짧응 탄성을 토했다. 딸과 손자의 죽음을 경험하고, 어쩌면 무너졌을지 모를 정신을 부여잡고 제대로 죽기 위해서 제대로 살았으면 하는 평범하면서도 속깊은 바람을 다스렸을 것을 생각하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비슷한 파장을 <눈눌 한방울>에서 느꼈던 기억이 있다.
“오래 산 사람을 늙다고 하고 (늙었다고) 노인을 늙은이라고 하면 화를 내지만 오래 쓴 물건을 낡다고 한다(낡았다고).
옷은 낡아도 몸은 낡는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과 물건이 다르다는 뜻이다.
물건은 죽을 수 없다. 산 적도 없었으니까. 생명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말 하나로 늙은이는 안심해도 좋다.
…중략
상자는 부서져도 상자 속의 공간은 없어지지 않는다.
당당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늙어간다.
비어 있는 것은 영원하다. 시간이 멈춘다.
바위의 이끼처럼.“
“한발짝이라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자.
한 호흡이라도 쉴 수 있을 때까지 숨 쉬자.
한 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하자.
한 획이라도 글씨를 쓸 수 있을 때까지 글을 쓰자.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
돌멩이, 참새, 구름, 흙 어렸을 때 내가 가지 고 놀던 것, 쫓아당기던 것, 물끄러미 바라다 본 것.
그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었음을 알 때까지 사랑하자.“
‘마지막은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고 차분히 준비하며 끝까지 썼다’는 선생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더이상 강의를 하지 못할거라는 허무함을 붙들어 ‘사치스런’기회를 준 마지막 제자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인터뷰어로 잘 듣고 제대로 쓰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고 바워둔다는 작사의 귀띔이 미세한 진동으로 바뀌고 이내 몸이 떨렸다. 공명의 경험이다.
사람으로, 글로 남는다는 건 사랑받는다는 말이다. 존경은 받았는지 몰라도 사랑받지는 못했다던 선생의 말에 ‘아니‘라고 거들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빛을 보고 같이 호흡하고, 그저 한 공간에서 지난함께하는 것으로 이렇게 종자기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눈부실 일인가. 사전 신청한 질문이 뽑혀서 작가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내게 제주는 바다가 아닌 파도였다. 안개를 해치고 돌어오는 길, ‘혹시 북콘서트에…’하고 물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근처에 사느냐는 질문에 ’산을 넘었고 이제 다시 넘어간다‘고 했다. ”멀리 오셨네요“ 제주의 시간과 거리감을 감안하면 수긍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심지어 날씨도 그랬다. ”오길 잘 했어요“ 군더더기 없는 솔직한 답, 환한 미소가 돌아온다. 손에 주전부리 간식을 들고 받기에는 미안할 정도다.
아름다운 토요일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영혼의 문을 열 기회를 기다린다.
*지음지교
춘추시대 거문고를 잘타는 진(晉)나라 대부 유백아(俞伯牙) 는 원래는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사신으로 자신의 조국 초나라로 가던때 고향을 찾았는데, 한가위 보름달이 밝아 기분에 취해 거문고를 탔는데 지나가던 나무꾼 종자기(鍾子期)가 듣게 된다.
그런데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높은 산을 떠 올리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태산과 같다 칭찬을 해주고 강물을 떠 올리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장강과 황하 같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자신의 거문고의 의미를 알아주던 종자기에 기쁜 백아는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다음해 백아는 종자기를 찾아갔지만 이미 죽고 없었다.
종자기의 무덤에서 연주를 한 백아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며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