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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28. 2023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를 들으며

삶, 공감하기 : 환향녀, 사진신부, 출가 해녀 그리고

“포와(하와이)에 가면 나무에 돈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는 말을 믿고 바다를 건넌 사람들, 그리고 여성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 하와이 이민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수년 째 계속된 기근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파랑새’였다.

마침 하와이에서도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터였다.

1903년 1월, 103명의 한국인이 증기선 갤릭호에 몸을 실었다. 3주간의 긴 여정은 1905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7226명의 한국인이 하와이 호놀룰루 땅을 밟았다.



# 파랑새를 찾아서

그래서 파랑새를 찾았을까.     

한국인의 미주 이민 역사라는 기억과 기록 속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은 고된 노동과 헐벗은 정서로 점철됐다. 험한 뱃길과 하루 12시간 넘는 노동에 먼저 투입됐던 남성들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안정적인 노동력 투입이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가정’이란 키워드가 작동한다. 따뜻해야 할 단어가 계산적인 의도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사진 신부(picture bride)’다.

미주지역에 한국인 사진 신부가 언제부터 왔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910년부터 시작되어 1911년경부터 본격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국에 있는 일본인들이 순혈주의 등에 기대 본국에 있는 이성과 사진과 서신을 통해 혼인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유사한 환경에 있던 한인들도 이를 모방해 고국에서 사진을 통해 신부들을 데리고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와이 정부에서도 소위 ‘사진결혼법’을 합법화하여 하와이에 오는 여성들의 입국을 허가하면서 사진교환을 통해 하와이로 이민 온 젊은 여성, ‘사진신부’의 서사가 시작됐다.

하와이에 첫 번째 사진신부는 『국민보』 1910년 12월 6일자에 실린 ‘지역 소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내수와 약혼한 한국 부인이 도항하였는데, 민찬호 목사가 이민국으로 가서 혼례식을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피하지 못했던 운명    


다만 서글프다.

남자의 사진을 고국에 보내 여자의 마음에 들면 여자가 자신의 사진을 보낸다. 그러면 남자 쪽에서 다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여비로 200달러를 보내는 것으로 이른바 ‘약혼’을 한다. 그렇게 배에 몸을 싣고, 알 길은 없지만 다만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란 믿음을 20여 일을 버틴 사진신부들이 마주한 것은 좌절이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 중에는 미혼의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결혼문제가 심각하였다. 또한 하와이의 한인 노동자들은 이동률이 높아 농장주들도 한인 노동자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미혼 남성들의 결혼을 추진하였지만, 독신의 한인 남성들이 하와이 현지에서 타국인과 결혼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절박함은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성으로 작동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비극이다.

하와이가 지상의 낙원이라는 중매쟁이의 달콤한 말도, 사진 속 ‘젊고 능력 있는’ 신랑도 현실에는 없었다. 신부를 불러들이기 위해 나이를 속이거나, 사진을 젊게 조작했는가 하면 농장 일을 위해 바다를 건넌 이들의 경제 사정은 주머니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드림'


‘어떻게’ 싶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흐름이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명치를 후벼판다.

1910년부터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된 1924년까지 951명의 '사진 신부'가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갔다.

모두가 행복했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를 꺼내 살짝 얹는다.

사진만으로 혼담이 오가다 보니 안타까운 일이 더 많았다. 사진보다 훨씬 나이가 많거나 살림이 어려웠고 나아질 거란 기대도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던 ‘사진신부’들 중에는 꽃다운 청춘을 두고 세상을 등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슬퍼할 겨를도, 피할 용기도 없이 결혼식을 올린 사진신부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청춘을 쏟아냈다. 중노동과 가난 속에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교육열로 자리를 잡는다. 특히 남의 집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장학금을 마련하기도 하고, 독립운동 자



#차별과 배제, 억압의 현실 앞에서


사진 신부' 천연희씨(1896~1997)의 유품이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지난 2014년.

1915년 6월 19살 나이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녀는  27살 연상의 ‘사진신랑’과 결혼한다. 두번의 이혼으로 무너질만도 했지만 사업가로 성공한 뒤 미국인과 결혼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결말이 남았을까. 현실은, 잔혹했다. ‘백인 남성과 결혼한’이란 낙인은 이후 ‘백인 남성에게 몸을 판 여자’라는 모욕으로 번졌다.

농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들은 인종과 계급적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뒤에는 공동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삶의 주요 고비마다 선택은 좌절과 고통을 수반했다. 인종, 민족, 젠더의 측면에서 차별과 배제, 억압의 현실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몇 번이고 울컥, 책을 덮었다 펴기를 수차례. 10여년 제주해녀의 흔적을 더듬으며 만났던 것들이 손거스러미처럼 일어나 신경 써 살피게 한다.


1921년 최초로 독도에 물질을 갔던 제주해녀들-김문길 교수 자료

#환향, 가족을 사랑한 죄


이 정도면 지독한 굴레다. 심지어 지난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상처를 남겼던 부분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다시 돌아온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 환향녀(還鄕女)의 역사가 그랬다.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은 약 6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적지에서 고생하면서도 고향을, 가족을 그리며 살아온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외면이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정유 양난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문중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등, 죽을 때까지 수모를 받았다.     

그 프레임은 사진신부 만이 아니라 출가 해녀들에게도 씌워졌다.

제주해녀의 출가 사연을 취재하는 동안 간혹 드러나지만 덮어달라는 당부에 꺼내지 못한 내용들이 그렇다.

돈을 벌러 출가(出稼) 물질을 다녀왔더니 동네 지기가 안방을 차지하고 있더라는 얘기도 들었고, ‘절대 돌아오지 마라’ ‘받아줄 수 없다’는 가족의 비난에 지역에 남은 사례도 여럿 있었다. 출가한 지역에서의 사정도 녹록치 않았다. 여성들만 있는 것을 이용해 희롱하는 일도 많았고, 몸과 마음, 경제적 피해를 입고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해 속병을 앓은 사정에 같이 운 일도 있다.

조선 시대 깊은 바다에서 전복 등을 채취해 진상하는 일을 하던 '보자기'(혹은 보재기)를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 한자음으로 옮겨 표기했다고 전해지지만 시간을 흐르며 해녀를 부르는 말로 바뀐다. 포작인은 깊은 수심에서 전복과 소라, 고둥 등을 전문적으로 채집하고, 해녀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중심으로 채집하여 역할이 비교적 구분되어 있었다. 진상 부담 등을 견디지 못한 남성들이 제주를 벗어나면서 대신 그 몫의 일을 해야 했던 해녀들에게 그 이름의 부여된 셈이다. 그것이 출가 지역에서는 ‘천한 일을 하는’의 의미까지 덧씌워져 고된 삶의 한 부분이 됐다.

‘돈을 벌러 간 것 아니냐’는 질책 뒤에 왜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나서야 했는지 부터 살펴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기미가요마루호를 타고 일본에 간 제주도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모습

#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


여기서 더 신경 써 살펴야 할 부분은 어느 것도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국가와 지배층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서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백성을 도탄에 밀어 넣은 결과가 사회 구조에서 가장 약한 여성들에게 일방적 폭력이 됐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나 무관심, 가정사 등으로 치부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덮는 데 급급했다. 그 모든 것을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니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부만 부각하거나 포장하는 것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제 5월이 다 저물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오월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아니 원곡으로 알려진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Qui a tue grand maman)'를 골랐다.     



예전 할머니 시절에는
정원에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어요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는 마음만 남아 있지요
그리고 두 손에는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요?
시간인가요?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세월을 보낼
시간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1971년 프랑스 샹송 가수인 미셸 폴나레프(Michel Polnareff)가 재개발을 반대하다가 희생당하자 할머니를 추모하며 만들어 불렀다는 이 노래를 둘러싼 말도 많지만, 오늘은 그냥 듣기로 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역사는 약자, 유독 여성에게 더 잔인했고, 심하게 무시했다. 그 ‘어머니’의 자궁에서 역사의 싹이 움텄고, 그들의 눈물이 숨을 돌게 했다. 그들 없이는 역사라 쓰여진 것들을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다. 지금은 울지언정 그들의 서사에 눈돌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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