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길'에서 묻다 : '귀한' 소금길을 더듬다 1
짠, 그리고 짠한 제주 이야기다. 지금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 풍부한, 보물섬이라 불리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척박하다 못해 뭍과 멀리 떨어진 탓에 먹고 사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1601년(선조 34) 제주서 발생한 모반 사건을 진상조사 하기 위해 파견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쓴 「남사록」(南槎錄‧1602)에도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6개월 간의 제주를 살폈던 김상헌은 ‘풍물편’에 ‘제주의 백성은 곤궁한 자가 많다. 이 땅에는 바위와 돌이 많고 흙이 덮인 것이 몇 치에 불과하다. 흙의 성질은 부박(浮薄)하고 건조하며 밭을 개간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달리게 해서 밟아줘야 한다’고 기록했다.
사는 일은 더 곤궁했다. 앞서 1519년(중종 14)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하여 진도에서 제주도로 이배됐던 충암 김정이 1520년 8월부터 사사(賜死)되던 1521년 10월까지 기록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는 ‘사기·도기·놋쇠·철은 모두 산출되지 않는다. 쌀은 매우 적음에, 토호들은 육지에서 사들여와 먹고, 힘이 달린 자는 밭곡식을 먹는다. 청주는 매우 귀함으로 겨울이나 여름을 막론하고 소주를 쓴다. 소 사육은 많이 하나, 값은 3~4정에 불과하다. 맛은 육지의 것만 못하다. 모두 산야에 길러 곡물을 먹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우스운 것은 땅이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나 소금이 나지 않은 일이다. 소금밭(田鹽‧전염)을 서해 지역과 같이 만들고자 하여 물을 당겨 갈아도 소금이 없고, 해염(海鹽)을 동해 지역과 같이 해 굽고자 하나 물이 싱거워 공은 백배나 들이나 얻는 것은 극히 적다. 반드시 진도와 해남 등지에서 사들인다. 때문에 민간에서 극히 귀하다’는 내용이 적힌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1)에 정리된 제주 토산품 중 ‘소금’이 있다는 점이나 「남사록」과 「남환박물」(南宦博物‧1702)에 ‘염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점에서 제주에서도 제염 활동이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이슈로 ‘소금’이란 단어에 유난히 눈이 간다. 사실 충암 김정의 유배 살던 동안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1573년 무렵 기록에는 ‘제주 목사 강려(姜侶)가 염전을 만들어 소금 제조에 나섰으나, 소량·하품의 소금이 산출되었고, 이 무렵부터는 제주에서도 소금을 만들어 관가 전용으로만 쓰게 되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 정도면 제주의 소금 사정은 우스운 일이라기 보다는 안타깝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싶다.
인류 역사에서 소금은 길을 연결하고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다. 소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짠 맛이 나는 그것이 그렇게 대단하냐고 물으면 ‘먹고 사는 문제’와 민감한 부분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사만 해도 47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소금은 바닷물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석탄과 나무를 연소시킨 결정에서 추출했다. 쓰임이나 요구에 비해 그 양이 턱없이 적었으니 귀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유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이어서 사회적 계급 구조에 격차를 만드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소금의 몸값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생산기술에 변화가 생기며 낮아지게 됐다.
우리나라 소금 사정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려 이전 소금 관련 문헌은 드물 정도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나오지만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염원을 두어 국가가 직접 소금을 제조 판매해 재정 수입원으로 삼았으며, 충렬왕 때 사유로 이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 말 충선왕(1275~1325) 때는 ‘각염법’을 시행해 소금의 제조·배급·판매를 국가가 독점 관리했으나, 정해진 소금값만 포나 쌀로 미리 징수하고, 제때 소금을 나눠주지 않아 민원을 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금은 국가의 주요한 재정 세원이었는데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사가 쓴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푸른역사)을 보면 “국가 입장에서 소금은 세수를 늘리고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국가는 언제나 소금세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염민(鹽民: 소금을 굽는 이들)에 대한 착취가 동반되었다… 백성이야말로 국가의 ‘짜디짠 소금 정책’으로 고통을 받는 존재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태조는 국가 전매를 폐지하고, 사적인 소금 생산을 허용했지만, 세종 때 흉년이 들자 빈민구제기관을 운영하는 재원으로 소금 수익을 활용하기 위한 전매제 논의가 다시 등장하고, 세종 27년(1445년) 일종의 소금 전매 기능을 가진 ‘의염색’이라는 관청이 설치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뒤에도 국가 재정 수입원으로서 소금 전매·세원 정책의 변경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 또한 저서 「경세유표」에서 지방마다 천차만별이었던 소금세 징수 기준을 통합해 징수량을 정할 것을 역설한다. ‘염책’이란 글에서 정약용은 '무릇 소금은 백성이 늘 먹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오곡이 있어도 맨밥을 먹을 수는 없고 비록 여러 가지 나물이 있어도 나물을 그냥 절일 수는 없다. (…)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이미 간절하니 국가의 권장이 당연히 후(厚)하여야 할 터인데, 한(漢) 나라 이후로부터 소금에 대한 행정을 까다롭게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고 적었다. 현실은 알았지만 정작 그의 뜻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여러 기록들을 보면 소금의 전매와 유통, 세금 제도를 둘러싼 난맥상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한국전쟁 뒤까지 이어졌다.
영악한 일제는 천일염을 화두로 식민지 조선의 염업을 재편했고, 전통적인 소금인 자염은 쇠멸의 운명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 북한지역에 천일염전을 많이 건설한 탓에 해방 이후 남한은 혹독한 소금 빈곤을 감내해야 했다. 민족 분단 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염전과 소금의 분단에 직면하게 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염증산 5개년 계획'(1952~1956)'을 세워 대대적인 천일염전의 증설에 나섰지만 1957년 10만t 상당의 잉여 소금이 재정적 부담으로 돌아오며 관련 정책을 다시 정비하는 수순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