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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세워뒀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아빠, 쓸모와 다정함의 해석

by 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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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아버지의 계절이다
말을 줄이고 일만 하는 아버지
혹한 추운 날엔
휴우 휴우 휘파람을 분다
#김남조 #아버지의 초상_중


다시, 아빠를 생각하는 기간


1월 아빠의 기일. 기억해 보면 그렇게 날이 좋았던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오가기 불편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못 갔던 적이 한 번인가 있었고, 이전 직장에서는 시간을 맞추지 못해 함께 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아빠를 기억하기에 이만한 시기도 없다. 마침 내가 ‘아빠’라는 존재와 만난 것도 겨울이고, 애쓰지 않아도 두런두런 모여있을 수 있으니. 올해는 여동생 부부가 함께여서 더 많은 얘기와 추억이 오고간다.

감기로 끙끙거리는 큰딸은 다른 건 다 닮았는데 자기 몸 챙기는 건 건너뛴, 회를 좋아하고 자기 일에 집중하면 다른 건 보지 않는 것만 닮은 작은딸, 눈치는 좀 모자라지만 제 몸 하나는 철썩같이 챙기는 막내…대충 이런 것들로 아빠가 완성된다.

때만 되면 엄마의 차가운(?) 눈초리를 피해 두 손 무겁게 퇴근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제집‧전과보다 <어깨동무>의 자리가 넉넉했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말도 안되게 무겁고 어려운 전집과 백과사전을 이고 지고 날랐던 일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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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났던, 나의 아버지


지금 생각해보면 딸들에게는 조금 유별난 아빠셨다.

세상 물정 모르는 10대 딸들이 행여 유행에 뒤떨어질까 좋아하는 가수 카세트테이프를 사주시겠다고 직접 데리고 나가셨던 일이며, 취업을 한참을 아끼고 아끼며 입었던 원피스도 아빠의 작품이다. 그 원피스가 그 당시 언론계에서는 한참 입방아에 올랐던 사실을 아빠는 모른다.

지금은 ‘할아버지’라는 단어만 기억하는 덩치만 큰 손자가 불쑥 나타나 “왔어요”하는 것을 즐기고 계시려나.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아빠가 좋아했던, 아니면 아빠가 좋아했을…같은 대화가 오고 간다.

“벌써 11년이네. 그동안 뭘 했나”하는 친정엄마의 말에 “잘 살았지”라고 추임새를 넣어줄 수 있어 다행이다.

시인의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강하고 외로운 아버지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무한 사랑인 우리의 아버지들을

오늘의 세상에선

문 안이 아닌

문밖에 세워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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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빈 자리는 언제나


뭔가 빠진 것만 같아 손가락이 간질간질. 조금 보탠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그렇다/뭔가 덜한 것만 같아서/그 모습을 이렇게 자꾸만 본다”라고 쓸 것 같다. 아버지의 마음에 조금 더 힘을 보태는 심정으로.

아파서 그런가 자꾸만 아빠가 생각난다. 벌써 병원까지 손 붙들고 가시고도 남았을, 좋다는 것은 죄다 구해다 주셨을.

왜 이렇게 아빠 생각이 났을까.

올해 생일주간의 마지막을 나름 우아하게 일과 함께 장식하고 있다. 뭐가 됐든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할 수 있게 아낌없이 응원하셨을 그가 나를 위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챙겨줬을거란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기자라는 일을 시작했을 때,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지만 뒤에서는 늘 자랑스러워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던 기분이 그리운 것인지도.

우치다 다츠루 선생의 <무지의 즐거움>을 읽다가 밑줄 플래그를 붙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부분이 있다.

‘자신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 자기가 가진 틀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기뻐’하는 이유에 대한 얘기였다. 그 일이 자신의 이해와 설명의 틀을 한 단계 성장시켜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 왠지 아빠의 조언처럼 들렸다. 아직 뭔가 ‘제대로’ 하는 것은 없지만 ‘쓸모’에 대한 생각은 다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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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 참 유용한 쓸모


그리고 다른 하나 ‘다정함’에 대한 생각도.

아빠의 응원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제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정함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빠 당신이 원하던 것도 있지만 대부분 누군가 쓰거나 먹거나 하는 것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는 걸 느낀다. 달마다 만화 잡지를 직접 사다주는 아빠가 세상 몇이나 있을까.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잘 됨'을 진심으로 빌어준 적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물음에 적어도 내게는 몇 명 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자 행복이다.

최근 며칠 누군가로부터‘다정하다’는 말을 들으며 특별하지 않은 마음씀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아빠의 영향이 컸다고 믿는다.

늦은 저녁부터 이어진 작업을 오늘 안에 마치면서, 서로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한참 주고 받았다. 어쩐지 명치 끝이 따뜻해진다.

다정함이라는 조건을 넣어 다시 쓰기를, 타인을 상상하는 일상의 다양한 선택들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를 조금 더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나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누군가를 인간성을 상실한 극한 상황으로 내몰지 않는 것, 모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정한 기술 사회의 도래는 가능할 것이다. 김민섭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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