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2월의 눈, 그리고 거인의 어깨에 오르는 일
대학생 시절, 내 이름에 붙여진 여러 수식어 중 하나가‘상병 3호봉 대우’였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특수(?)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갔던 덕분에, 전에 없던 친구들이 늘었다. 군대 간 동기들이 휴가를 나와 학교에 오면 최소 두 번 중 한번은 만날 수 있는 대상이었던 탓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수많은 병과와 산전‧수전‧공중전은 물론이고 우주전쟁까지도 가능한 무용담을 듣고 또 들어줬다.
눈을 반짝이며 믿어줬던 얘기의 대부분의 허풍인 걸 이내 알아챘지만 매번 속아주고 맞장구도 쳐줬다. 그렇게 한 1년쯤 지나고 나니 복학생들까지 인정하는 상병 3호봉 대우 수준의 군대 지식을 보유하게 됐다.(잘 들어주는 습관은 이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매일 부대에 보급된 총알의 숫자를 세고 사라진 하나의 미세한 흔적까지 추적했다는 A와 우리나라 전 부대 부식 비용을 맞추며 힘 좀 썼다는 B, 귀신 잡는 해병대라며 늘 어깨에 힘을 줬지만 사실 전역 때까지 PX를 사수하며 선임들의 관리를 받았다는 C 등등 정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군대와 군인 이야기를 쌓았다. 흔하기도 하고 절절하기까지 한 곰신 얘기만 빼고.
그 경험 때문일까. 2월 눈은 말년 휴가 나온 동기 같은 느낌이다. 반가움은 아주 잠시, ‘또‘ 그리고 ‘언제’가 혼재된 기분으로 어설프게 시간을 쓰고 머쓱하게 헤어진다. 편하지 않은 기분이지만 입은 웃으며 안부와 응원을 한다. 그를 보낸 세상과 그가 온 이 세상의 꽤 먼 거리 만큼, 같은 시간을 다르게 보는 시선만큼 어정쩡해진다. 낯선 표정과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공감이 쉽지않은 그들만의 경험이 삐꺽삐꺽한다.
입춘을 끼고 기세등등 쏟아진 눈 폭탄과 한파에 일상이 비틀어져 버린 느낌이 꼭 그랬다. 알고 있는, 익숙할만도 한데 하얀 그 것이 마냥 곱지는 않았다.
오세영 시인의 2월의시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
며칠 펄펄은 고사하고 가로로 마구 날리는 눈 바람과 그 사이를 비집고 느닷없는 쏟아진 햇살에 휘둘렸던 마음에 벌써가 내려앉았다.
1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데 달력은 2월이고 이미 여러 스케줄들이 12월까지 빈 자리를 잡았다. 눈 뜨면 아침이고 돌아서면 저녁이고, 이제 월요일인가 하면 주말 일정을 묻는 SNS가 난리고, 다이어리 ‘1일’표시를 어제 본 것 같은데 이달의 남은 날이 보낸 날보다 적은 상황에 ‘벌써’를 부른다.
언젠가 세월의 속도가 나이와 비례한다는 말을 가볍게 웃어 넘긴 적이 있었다. 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조급함과 남은 날에 대한 미련이 만든 속도감이란 것 비로소 느낀다. 한해, 매달을 넘어 겨우 하루의 몇 시간을 쓰는 것으로도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꼬박 몇 시간을 움직이지도 않고 자료 정리를 하고 어둑해진 창밖을 보면서 한숨처럼 ‘벌써’를 쏟아냈다.
‘벌써’보다는 ‘왜’가 어울리는 상황이 됐다. 답이 쉽게 나올리가….덕분에 두달 넘게 들고 다니던 책 하나를 마쳤다. 성공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행동하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다. 사실 ‘성공’이란 단어에 끌렸다. 책을 읽으면서는 이미 알고 있지만 하지 못하는 것과 애써 모른 척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긍정과 잠재력 같은 쓰면 쓸수록 힘이 되는 단어의 맛도 즐겼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것, 그것이 성공의 기준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꽂힌 이 문구는 우리에게 협력과 지식의 축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킨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 느꼈기 때문에 더 강력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행동했나’ ‘얼마나, 아니 진심을 다해 움직였나’….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고 움츠러든다.
여기서 멈췄다면 사실 나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문장을 읽었다. 중요한 포인트는 ‘성공’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이란 걸 느끼면서 자유로워졌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과거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겸손의 메시지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제안하는 말이다. 거인의 어깨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오르기까지 과정이 원하는 결과에 닿게 한다는, 답을 다시 썼다.
아이작 뉴턴이 남긴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그는 천재적인 물리학자였지만, 자신의 발견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위대한 학자들의 연구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했고, 그렇게 같은 거인이 됐다.
차분히 생각하고 다시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역시 단번에 습관을 바꾸기는 힘들다. 창밖 한 번 내다보고, 텀블러에 남은 커피 양을 확인하고, ‘벌써…’를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집중력이 50% 차감됐다. #병_이다
그래서 서둘러 눈에 띄는 부분을 체크했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아는’을 내려놓고 ‘누군가 잘 정리해놓은 것을 참하게 챙기는’을 택했다.
‘아주 작은 행동의 누적’
1. Personal (개인적)
* 자신만의 진정한 목표 설정
*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내면의 욕구 반영
*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 수립
2. Positive (긍정적)
* 부정적 표현 대신 긍정적 표현 사용
* "하지 말아야지대신 “이렇게 하자” 사용
* 긍정적 마인드셋 형성
3. Present tense (현재형)
* 목표를 현재형으로 작성
* 잠재의식에 직접적인 영향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는 과정까지, ‘채울 것’리스트에 넣고 조곤조곤 생각할 시간이 생겼으니 ‘벌써’증후군도 두렵지 않아졌다. 2월 눈도 썩 싫지 않다. 지금 생각해보니 말년 휴가 나왔다고, 이제 얼마 있으면 사회인 복귀라고 일부러 기척 해 준 동기들의 마음씀 비슷한 것을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