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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설레는 미련을 남기고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부산 남포동 <매일이 다르다>에서

by 고미

무겁게 쌓았던 시간을 덜어내고


벌써 2022년의 일이 됐다. 26년 다닌 직장을 그만 두면서 더 이상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던 기억하기도 끔찍한 일들이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나 여러 이유들로 버티야 했다. 이번은 달랐다. 더 버티다가는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숨막히는 시간들로 생명이 갈려 사리지는 느낌들로 괴로웠다. 그나마 온전하게 퇴직금을 받고 내 발로 나오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100일을 쑥과 마늘을 먹는 심정으로 견뎠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아니 시작하게 된 일은 이전과 닮았지만 닮지 않은 무엇들로 흥분과 긴장을 반복하게 했다. 익숙하다 못해 오감에 각인됐던 지난 일들의 이점을 버리고 새로운 일에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뭐랄까 주변을 사랑하고 나름 소소한 도전을 즐기는 성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잦은 출장으로 몸은 힘들지만 그 곳에서 새로 찾은 작은 공간들에 혼자 가슴 설레고, 다시 찾을 이유를 만드는 것이 기쁨이 됐다. 올 첫 출장에서도 그랬다.

초봄에 가까운 어느날의 산책


때마침 볕이 보드라웠다. 며칠 전만 해도 눈 가루 날린다고 눈 흘기던 나무들이 은근한 초록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거칠기만 하던 아스팔트 위로 어제와 다른 느낌들이 소복하게 쌓였다. 지난 저녁의 흔적과는 분명히 다르다. 어쩌면 흘러가는 계절의 흔적을 덜어낸 위로 가벼워진 차림에 엷은 목도리를 두르고 걸어가는 이들의 기대가 발자국처럼 남은 때문인지 모르겠다.


상점가 인근 골목은 단정하지 않은 대신 여기저기 슬쩍 마음을 걸칠 여지를 준다.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예전과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큰 길 대신 조금 경사가 있는 오르막을 따라 걸었다. 낯설다. 뭔가 있을 것이란 예상은 했지만, 우연히 만난 공간은 시간을 슬쩍 뒤로 돌린 듯 정겹고 또 고즈넉했다. 이런게 제대로 럭키비키_다.


‘매일이 다르다’는 느낌 있는 이름의 카페에는 ‘책읽기 좋은‘ ’혼카하기 적당한‘같은 수식어가 있었다. 문을 연지 7년 정도 된 비건 카페라고 했다. 옛 공간을 그대로 쓴 듯한 느낌이 출입문에서 부터 느껴진다. 메뉴가 단촐한 대신 구석구석 눈 뗄 곳이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맘에 쏙 하고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테이블 받침. 어딘지 낯익다…싶었는데 오래된 재봉틀이었다.


익숙하거나 때론 그리운 것들


해녀 취재를 할 때 허락을 받고 들어선 어머니의 방에서 만났던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지역에 나가 고된 노동에 눈칫밥까지 먹어가며 벌어 모은 것들로 오직 자신의 미래를 위해 목돈을 썼던 품목이 다름 아닌 재봉틀이었다.


처음은 손재봉틀이 다음은 발로 패달을 받는 반자동, 그리고 버튼을 작동하면 다다다 소리가 부지런했던 자동 재봉틀까지. 자신의 능력을 확인시키는 혼수였다. 또 가족들을 위해 솜씨를 쓸 수 있다는 재주를 인정받는 장치이기도 했다. 기성복이라는 것이 등장하며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이렇게 엔틱 소품으로 활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발판까지 수줍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너무 반가워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아 감상 삼매경에 빠졌다. 그런 풍경이 흔했는지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던 주인장이 무심히 한번 쳐다보고 만다. 오히려 알아봐 주는 걸 좋아하는 눈치다.


날 좋을 때면 자연 채광으로 반짝이는 낡은 테이블 옆에는 책읽다가 날 새는 줄 모를 것 같은 작은 1인용 책상. 공간을 가득 채운 8인 테이블이 궁금하던 차에 '어정쩡한 수요일엔 영화를 봅시다'라고 적힌 포스터가 시선에 걸렸다. 불투명 유리가 오래된 추억을 건드리는 나무 찬장과 세월을 한껏 머금어 상아색이 된 타일까지 흠뻑, 취해버렸다.


그리움은 다시를 부르고


정신없이 공간 탐험을 하는 사이 따뜻한 커피는 한눈에도 손땀이 느껴지는 코스타 위에서 다소곳히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덕분에 시간을 머금고 여유있게 주변을 본다. 포푸리 상점이라는 작은 뜨개 소품 판매 공간이 들어온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는 않은 창이 바깥 풍경을 매력있게 잡아 낸다. 카페 집 꼬마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아빠’를 부른다. 공간 안에 단 세 사람, 낮게 속삭이는 인디 밴드의 음악이 흐르는 사이 아이의 목소리가 섞이는 것이 마치 아주 짧은 독립영화 한편을 보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나에 집중하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습관처럼 집어든 책 속 한 구절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대놓고 숨 돌리는 쉼표보다 무심하고 투명한 띄어쓰기와 닮은 시간이 좋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시간이다. 글을 쓸 때 띄어쓰기를 대충하거 나 띄어쓰기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엉망이 될 것이다. 흐르는 시간에 우리의 흔적을 새길 때도 마찬가지다. 달리거나 뛰어오르는 동작도 필요하지만 가만하고 무용한 몸짓도 결국 쓸모가 있다’ #적적한 공룡 만화_중


이런 우연은 그냥 좋다. 다음 일정만 아니었다면 어쩌면…하는 꽤 설레는 미련을 남기고 총총 내 자리로. 그래야 했다. 매일이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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