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사가 세상을 ‘상관있게’하기를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읽기-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by 고미


어떤 직업이 사라질 것인가? 직업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에 한가지 더하고 싶어졌다.어떤 직업들은 사라지는 게 나은가?


#꾹꾹 씹기만 했던 문장들


‘르포에세이’라는 알 것 같지만 어딘지 낯선 장르의 글을 파듯이 읽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 마킹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다 못해 짧거나 긴 메모를 해가며, 꾹꾹 씹었다. 씹는 것까지는 했지만 삼키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맛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쓴맛이 계속 올라오는 것에 어느 순간 중독됐다.


“직업이 사라진다는 것은 생계 수단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던 특정한 종류의 인간 역시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잠깐 시선을 놓치는 순간 대열에서 멀어져 아등바등하는 자신을 보게 되는 초격차의 시대에 과연 어떤 ‘동사’들이 사라질 것인가를 묻는다.

단순히 사라질 직업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의 형태를 명시하고 그 이유를 현장 경험을 통해 서술하는 과정은 마치 ‘손이 가요~’하는 스낵을 입속에서 사정없이 부수는 느낌이었다.



# 대체된 쓸모가 남긴 것


여기서 ‘멸종’은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으로 대체됐음을 의미한다. 이전과 쓸모가 바뀌었거나 의미가 달라졌다고 보면 된다. 물론 국어사전에도 남아있고 대화에도 등장하지만 차마 인지하기도 전에 존재감이 희미해졌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사라질 것에 대응해야 하냐면 저자는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남겨야 한다는 조언을 한다. 누군가는 아직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달라진 상황 역시 누군가의 감정과 수고가 전제된 것이라는 생각도 보탠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소설가 김훈의 유명한 말이다. 기후가 지표면의 풍경을 결정하듯 어떤 일을 하느냐는 피부 표면의 풍경을 결정한다.

누구나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버틸 수 있는 물리적 한계라는 게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매일 같이 견고하지 못한 그 육체를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을 요구받는다. 일을 마치려면 자신을 보호하려는 가장 기초적인 요구를 무시해야 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짐의 무게, 양, 작업 속도 어디에도 인간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택배 기사의 영역에서 부대끼면서 이런 느낌,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다니. 박웅현의 <여덟 단어-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중 최소 2개 이상의 단어가 녹아있다고 느꼈다. 본질(本質)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견(見) 이 단어의 대단함에 관하여, 그리고 현재(現在) 개처럼 살자.


#그리하여 우리의 동사는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다. 내 책 좌우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책장에서 빼내 보니, 다른 책들은 새 책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반면 내 책은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러분《수학의 정석> 옆면을 살펴보면 첫 번째 집합 부분만 누렇게 손때가 묻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으신지? 말하자면 그 책이 그 서가의 집합 챕터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다는 게 아니다. 그날 작은 도서관의 가장 인기 없는 코너 구석에서 느꼈던 것은 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 감각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곧잘 세상을 떠나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그 순간 내가 도서관에서 느꼈던 감정과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면서느꼈던 감정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통하였다는 느낌, 그들과 내가 교감을 이루었다는 충만감이었다. 나는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 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세상의 한복판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 같다.


근육을 산속에 난 길과 비슷하다고 느낀 저자는 ‘요리라는 일은 육체라는 산 전체에 빠짐없이 길을 내는 작업’이라고 정리했다. 단순히 요리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고 뒷정리를 하는 전 과정을 살핀 뒤 나온 표현이다. 물과 불, 습한 열기와 날카로운 금속 날 등등이 공존하는 친절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관절부터 온몸 끝 여기저기를 긴장한 상태에서 무식할 만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꾹 눌러썼다.


#그래서, 쓰다 썼다


이 ‘썼다’는 행동을 저자는 상관있게 만드는 일로 접근한다.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과 닭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무리하며: 쓰다 중에서


그래서 다시 긴 생각에 일부러 빠졌다. 나의 쓰기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 와중에도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과연 쓰는 것인가 라고 자문을 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간혹 그 자판 두드리는 행위도 귀찮아 말을 자동으로 옮겨주는 기술의 힘을 슬쩍 빌려쓰기도 한다. 내가 그 ‘멸종’에 한 몫하고 있구나. 다시 쓴 맛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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