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넘어 레거시를 봐야 하는 이유

지역력탐구생활 : 농업유산 등재 이후

by 고미

지난해 11월, 국내외 농수산 분야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 지역 실무진이 모인 ‘파트너십 강화를 위한 GIAHS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일정이 겹쳐 현장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 자리가 던졌을 질문은 이미 익숙하다. 농업유산은 지정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물음이다.


숫자는 늘었지만, 질문은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2014년 청산도 구들장 계단식논과 제주 밭담 농업시스템을 시작으로 현재 9곳이 GIAHS에 등재돼 있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농업유산을 보유한 국가다. 제주는 육지의 밭담 농업시스템과 바다의 해녀어업 시스템, 두 개의 유산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드문 지역이기도 하다. 숫자만 보면 성과는 분명하다.

다음 단계를 설계하는, 일


그러나 국제적 흐름과 비교하면 질문은 달라진다. 중국은 농업유산을 제도화하며 국가 차원의 관리체계를 강화하고 있고, 일본은 도농교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생태·경제·사회 지표를 활용한 단계별 모니터링, 기후변화와 식량안보 대응 같은 논의도 활발하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응은 여전히 축제, 관광 프로그램, 체험 행사 중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핵심 지역 보존과 주민 소득 창출을 함께 이야기하지만, 실제 내용은 예산 규모나 지역 관심도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인다.

무엇이 작동을 막는가


이 한계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농업유산과 어업유산은 소관 부처가 다르고, 유산 간 연계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린다. 해양수산부는 국가중요 어업유산에 국비·지방비를 포함해 연간 7억 원 내외, GIAHS 등재지에는 최대 3억 원 안팎을 지원하며, 그 배경에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정책 논리를 두고 있다.


반면 농림축산식품부는 2024년 이후 농업유산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지역 차원의 모니터링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지자체 역시 국비 의존 구조 속에서 별도의 명분을 만들기 쉽지 않다. 그 결과 밭담축제나 해녀축제와 같은 농업유산 관련 사업이 일반 마을축제와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 않다.

유산 보존 vs 생업 보호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농업유산은 정책 대상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생업이라는 점이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보존만을 이야기하는 순간, 유산은 일상의 선택 앞에서 가장 먼저 흔들린다.

밭을 팔거나 길을 넓히는 일상의 선택 하나로도 유산은 쉽게 흔들린다. 수익을 포기한 채 사명감으로만 유산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보상’이라는 말 역시 한계를 가진다.

청산도 구들장논이 던지는 질문


이달 중순 열릴 컨퍼런스 참가 준비를 하던 참에 청산도구들장논의 꾸러미를 받았다. 한해 잘 키운 잡곡류와 들기름, ‘건강듬뿍’ 뻥튀기 등을 알차게 챙겼다.

구들장논을 지키는 후원자인 ‘오너’로서 누리는 특권이다.

청산도구들장논은 사회적협동조합 구들장논보존협의회를 축으로 보존하고 있다. 생산성 같은 것을 놓고 보면 요즘 기준에서 한참 동떨어져있지만 힘을 내고 있다.


구들장논은 청산도의 척박한 비탈을 개간해 만든 독특한 논이다. 전통 온돌에 쓰이는 구들장을 논바닥 밑에 깔아 물길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는 방식이다.


주로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서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멸종위기 판정을 받은 긴꼬리 투구새우도 서식하고 있다.


문제는 이 논과 농법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오너제다. 농업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아 ‘유산‘을 지키는.

다만 이 모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상 유지’이상의 수익을 올릴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더 많은 이해와 인내가 있어야한다. 그때까지 더많은 오너가 손을 보태야할 지 모른다.

제주가 마주한 다음 실험


제주 사정은 좀 다른 고민이 있다. 최소한 두 개 농업유산의 연계부터 협력 시스템 구축 같은 다른 지역들에서는 없는 실험이 있어야 한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닌 우리가 가져가야할 방향 위에 있는 일이다. 가능하게 하는 일도 우리 몫이다. 예산이 방향을 정하도록 두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방향을 만들어야 한다.


농업유산 지정 이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산을 지키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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