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지는 사람이 살아남는 이유

지역력 탐구생활 : 예능을 보다가 직업병 발동

by 고미

쉬려고 고른 예능에서도 자꾸만 일을 떠올리게 된다.

예전에는 누가 이길지, 누가 더 간절한지에 마음이 갔다면 요즘은 이상하게도 누가 어떤 순간에 움직였는지가 먼저 보인다.

아마 그 이유는 분명하다.

AI가 일을 점점 더 잘해주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보다 ‘누가 어떤 책임을 지는가’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됐다.

AI는 정답에 가까운 경로를 빠르게 계산한다. 그 덕분에 사람은 더 이상 ‘정답을 만드는 자리’에만 머물 수 없게 됐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않을지, 누가 결정할지, 그 책임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올해 몇 차례 AI 활용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고 고민했던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팀은 늘 같은 질문 앞에서 멈춘다


현장에서 봤던 팀들도 결국 같은 질문 앞에서 갈팡질팡했다.

대부분 ‘왜’에 무너진다. ‘왜’의 능선을 넘고 나서는 다시 ‘어떻게’의 계곡에서 무너지곤 한다.

실제 기술이 좋아서, 자본이 많아서,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떤 책임을 누가 감당하는지에 따라 팀의 속도가 달라진다.

AI가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가 되면서 이 차이는 더 벌어진다.

‘만드는 능력’은 평준화되고, ‘의미를 책임지는 능력’이 남는다.


다른 무대, 닮은 구조

이 변화는 사실 기술 컨퍼런스가 아니라 예능에서 이미 보았던 것들이다.

흑백요리사 시즌2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조직과 리더십, 팀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된다.

누가 무엇을 잘하고, 어떤 요리를 만들고 같은 것보다 조직과 리더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팀이 어떤 방식으로 이기고 또 무너지는지, 사람은 AI 앞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가 생각보다 정직하게 드러난다.

흑백요리사만이 아니라 최종 승자를 가리는 오디션 형태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영웅이나 스타 탄생의 서사보다 능력을 발현하거나 발휘하는 타이밍과 역할에 있다.


모두가 리더일 때, 가장 필요한 사람


예를 들어 흑백요리사 팀전을 보자.

‘다 리더인 사람들’이 팀을 이뤘을 때 그 안에서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이 또렷하게 보인다.

각자의 주방에서는 모두가 리더다. 자기 방식이 있고, 자기 확신이 있고, 자기 속도가 있지만 팀으로 묶였을 때는 역할이란 것이 주어진다.

누군가는 따라야 하고, 누군가는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서로의 경험치가 다른 상황에서 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선택들의 ‘부딪히지 못하는 충돌’은 부지기수다.

AI 시대 조직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각자 전문성이 강하고, 개별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누가 무엇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가 어려워진다.

개인들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빨라지는데, 팀은 오히려 느려질 수 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견이 많아질수록, 결정은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 팀을 살리는 것은 ‘제일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판을 정리하는 사람’이다. 이른바 결정 비용을 대신 지불하는 사람이다.

요리괴물은 팀이 느려질 때 가장 먼저 결정을 떠안는 사람이다.

손종원 셰프는 리더의 방향을 믿고, 그 위에 결과를 얹는 역할을 한다. 최강록은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느끼는 위험을 먼저 감지한다. 선재스님과 후덕죽 상무는 조직이 흔들릴수록 말을 줄이고 손을 움직인다.

리더의 역할은 정답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흐름을 단순화하고, 결정을 미루는 공기를 걷어내고, 그 결정에 따르는 비용과 책임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오는 사람이다.


그래도 사람은 남는다


AI 시대에 남는 경쟁력은, 생각보다 빠른 답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책임을 가져갈 수 있는지다.

AI는 이미 정답에 가까운 경로를 빠르게 계산하고, 선택지를 넘칠 만큼 제시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엇을 버릴지, 어디까지 할지, 누가 최종 결정을 맡을지, 그 책임을 어디에 둘지는 여전히 사람이 정해야 한다.

그래서 AI 시대의 리더십은 ‘잘 판단하는 능력’보다 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에 가까워진다.

요리괴물이 보여준 리더십이 지금 더 설득력 있게 읽히는 이유다.


팀의 생명력 ‘팔로우십’


좋은 팀은 리더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흑백요리사에서 인상적인 건, 리더가 아니라 팔로워들의 움직임이다.

여기서 미국 작가 스티븐 프레스필드(Steven Pressfield)의 《최고의 나를 꺼내라》를 펼쳐 ‘프로의 태도’를 살핀다.

프레스필드는 진짜 프로의 기준을 재능이나 실력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을 어떻게 다루는가’에서 찾는다.

진정한 프로는 도움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 정상에 서 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를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AI는 실패를 오류로 분류하지만, 인간은 실패를 통해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을 얻는다. 그 감각은 데이터가 아니라, 직접 겪은 실패에서 만들어진다. 위기의 순간, 팀을 살리는 것은 대개 이 감각이다.

지금 말하지 않아서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면, 누군가 불편해하더라도 말해야 한다.

실패를 지나온 사람의 진짜 가치는 문제가 터지기 전에 균열을 알아보고, 팀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향을 조금 바꿀 수 있다는 데 있다.


연말에 남는 다짐 하나


연말이 되면 늘 비슷한 다짐을 한다.

더 잘해야지, 더 빨리 가야지, 더 많이 알아야지.

그런데 올해는 그 문장들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AI가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에 내가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완벽한 답을 내는 사람이 되기보다,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책임을 피하지 않는 사람.

내년에도 나는 아마 예능을 보며 또 일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누가 더 잘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순간에 움직였는지를 계속 보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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