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느슨해야 썩지 않지"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세계 습지의 날 '촘항'에서 배운 지혜

by 고미

“여기 이 부분은 느슨하게 해야 물이 타고 내려간 뒤에 얼른 말라서 썩지 않아.” “손이 가고 만드는 것이 까다로워도 다 물 지러 가는 노동을 줄이려고 한 거주.”

마을 어르신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쫑긋, 아침 ‘눈 조심’ 기상정보로 흔들렸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습지센터 일대에서 진행된 '세계 습지의 날' 기념 시민 참여형 행사에 참여했다. 꽤 오랜만에 찾은 습지센터다. 예전 기억을 더듬으며 찬 기운 사이를 달렸다.

세계 습지의 날(2월 2일)은 유네스코(UNESCO)가 1971년 이란 람사르에서 동식물의 주요 서식지인 습지를 체계적으로 관리, 보전하기 위한 ‘람사르 협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해 지정한 날이다. 습지의 생태적 가치와 보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기획, 운영된다.

현재 국내 람사르 습지 26곳 가운데 5곳(물영아리, 물장오리, 1100고지, 동백동산, 숨은물뱅듸)이 제주에 있다. 숫자로 정리하면 단순하지만, 이름만으로도 그 풍경이 떠오르는 곳들이다.

올해 세계 습지의 날 슬로건은 ‘습지와 전통지식: 문화유산의 기념’. 동백동산에서는 선흘1리 주민들과 함께하는 ‘촘항 만들기’와 도토리 칼국수 체험, 습지해설사가 동행하는 동백동산 생태 탐방이 진행됐다.

촘항은 제주 전통 빗물 저장 방식이다. 중산간 마을들에서는 새촘이라 불렀다. 짚으로 댕기 머리 따듯 새를 엮어 만든 촘을 활엽수 허리에 둘러 아래 둔 항아리에 모이게 하는 간단한 구조지만, 흘러내려 오는 빗물은 촘을 지나며 불순물이 걸러져 깨끗한 물만 남게 했던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를 담고 있다.


민속지식이라고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는 것이 전부다. 활엽수를 선별하는 것은 큰 잎을 이용해 빗물을 허투루 흘리지 않고 한 곳으로 모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촘을 엮는 과정은 촘촘하지만 정작 그 것을 나무에 걸 때는 적당히 느슨하게 조절한다. 빗물이 촘을 타고 항아리에 닿는 동안 불순물이 걸러지며 깨끗한 물만 남는다. 너무 빡빡하게 두면 젖은 상태가 오래돼 썩게 된다는 점을 우려해 바람이 통해 잘 마르도록 느슨하게 맸다.


어떤 나무에 촘을 걸었는지, 물항아리가 몇 개였는지가 생활 수준을 구분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때죽나무를 이용해 받은 물은 다른 것들에 비해 유지 기간이 길고 맛도 좋았다고 한다. 부잣집은 촘항은 크기도 클뿐더러 그 개수도 많았다.


촘이 요긴했던 이유는 샘물에서 길어 올린 것보다 유용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상수도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 한 두 식경 거리를 오가며 물을 지어 나르는 수고를 덜 수 있어 좋았고, 일주일 버티기가 힘든 샘물에 비해 '석 달을 숙성해야' 깨끗한 제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을 터다. 그 과정에서 다시 선인들의 지혜가 빛난다. 과거 촘항에는 '개구리'가 있었다. 먹을 수 있는 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습지까지 가서 물을 구해야 했던 이들에게 촘항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물 한 방울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것으로 수고를 덜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얻어 쓰는 공존의 지혜가 응축된 유산이다.

이렇게 의미 깊은 유산을 직접 만들어보다니! 하는 설렘은, 안타깝게도 10초 컷'으로 끝났다.


자연 앞의 ‘자신감’은 언제나 미약하다. 나름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 앞에서는 무용지물. 솔직하게 내 손이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하…

한참 설명을 듣고 바닥에 탁탁 두드려 고르게 정리하는 것까지 어찌어찌 통과. 촘을 엮을 한 줌을 건넨 것을 빼고 띠를 꼬는 것도, 허벅 구멍을 막을 매듭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로 분류됐다.

의욕적으로 도전한 도토리 칼국수도 반죽 몇 번 주무르다 “이쪽으로 넘기라”로 정리.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기도 전에 먼저 포기 선언을 한 걸로 마무리했다.

그런 것 치고는 마을 스타 삼촌과 인증샷도 찍고, 도토리 칼국수에 계란물과 고명을 넣는 화룡점정 역할을 맡았으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만 같은 만족감이 채워진다.

‘올해는…’ 하고 다짐하며 정신없이 한 달을 보냈다. 오늘은 어쩌면 “느슨해야 썩지 않는다”던 어르신의 말씀처럼, 내 삶에 필요했던 느릿하고 작은 틈이 아니었을까. 그 느슨한 틈 사이로 동백동산의 맑은 기운이 오래도록 흐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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