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의 재구성 : 지역을 살리는 세가지 동력

지역력 탐구생활 : 로컬창업·로컬크리에이터·로컬벤처

by 고미


[로컬의 재구성] [로컬창업·로컬크리에이터·로컬벤처_같은 말인 듯 다른 말들] [긴 호흡]


‘제주 로컬크리에이터 경제의 이해’강의를 맡았다. 공직자 대상이라 신경을 쓰다보니 처음 준비한 강의자료가 60장이나 됐다. 50분 강의에 이 무슨…하는 생각에 강의 직전 50장 수준으로 줄였다. 그리고 내리 3일, 4번 강의를 하면서 3번 정도 더 손봤다.


덜고, 비우고 또 채우는 작업이 이어진 데는 시각차가 있었다. 늘상 로컬 안에 있다보니 강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기준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에 없던 것‘을 편하게 흡수하게 하는 난이도 극강의 미션이었다.


첫날 ’그게 뭐?!‘반응에 상처받고 좌절했다가 절차부심 접근 방법 선회, ‘보다 쉽고 익숙하게’를 주문처럼 외우며 다듬고 다스리며 금요일 오후에 다달아서는 약간이지만 흡족한 반응들로,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

- 정책상 로컬과 현실 ‘로컬‘


로컬 얘기다. 살짝 긴장을 푸는 사이 새로운 챌린지가 열리는 게임 같은 단어다.


요즘 정책 현장과 미디어에서 종종 등장하지만 명확하게 ’이 것’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로컬창업, 로컬크리에이터, 로컬벤처라는 말이 순번없이 등장하고 별구분없이 쓰이기 때문이다.


공고문에는 ‘지역가치 창업가(로컬크리에이터)’가 적혀 있고, 지자체 브리핑에서는 ‘로컬벤처 생태계’가 목에 힘을 주고, 현장에서는 “지역에서 작은 매장 하나 열고 싶다”는 청년들이 자기 일을 ‘로컬창업’이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기엔 다 아는 말 같지만, 막상 구조를 그려보면, 그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층이 뒤섞여 있었는지 드러난다.


정책은 하나의 단어를 붙이는 순간 예산과 제도가 따라온다.


그래서 이 개념들이 혼용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리스크가 된다.


어느 지역에선 ‘로컬크리에이터’를 육성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소상공인 일반 지원에 머물고, 다른 지역에선 ‘로컬벤처’를 말하면서도 정작 스케일업은 고려하지 않은 채 창업교육에서 멈춘다. 문화 영역에 가둬쓰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은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말하는 로컬은 과연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


- 말이 엇갈리면 정책도 엇나간다


먼저, 정책 문서와 연구에서 이 세 가지가 어떻게 다뤄지는지부터 살펴보자.


• 로컬크리에이터


중소벤처기업부는 로컬크리에이터를


‘지역의 자연과 문화 특성을 소재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결합해 사업적 가치를 창출하는 창업가’라고 정의한다.


정리하면 지역 자원 × 콘텐츠 × 브랜드에 방점이 찍혀 있다. 로컬크리에이터 육성사업 누적 데이터를 보면, 30대 이하가 약 60%, 비수도권이 80%를 차지한다. 구조적으로는 전 연령 소상공인에게 열려 있지만, 실제 참여 주체는 비수도권 청년 창업가들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 로컬창업 / 로컬 엔트리프러너십


국내 연구에서는 로컬창업을


지역상권 내 앵커 스토어, 라이프스타일 기업 등이 정착과 상권 회복, 지역경제 회복탄력성에 기여하는 과정으로 분석한다.


해외에서도 ‘지역·지방 Entrepreneurship’이 지역발전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다.


• 로컬벤처 / 벤처 생태계


최근 중기부와 연구기관들은 인구 감소와 저성장 국면에서 지역 벤처 생태계를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인구·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해 ‘지역 단위의 혁신 생태계 경쟁 체제’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문제는, 이렇게 정책·연구에서의 의미와 현장에서 사람들이 쓰는 생활 언어로서의 로컬 사이에 미묘하지만 큰 간극이 있다는 점이다.


현장에선 종종 로컬창업 = 로컬크리에이터 = 로컬벤처 처럼 섞여 쓰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셋은 담당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


이 세 가지를 인구정책과 지역경쟁력이라는 두 축 위에서 다시 정리해 보고 싶었다.


- 로컬창업 - 지역 생태계의 ‘저변’을 떠받치는 힘


로컬창업은 가장 바닥에 있는 층이다.


사람이 한 지역에서 살 수 있는지 여부를 가르는 층이다.


최근 연구들에서 지역 상권 내 앵커 스토어나 생활밀착형 로컬 기업이 정착과 상권 회복에 미치는 영향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다.


밥을 먹을 곳, 세탁소, 떡집, 작은 공방 같은 것들이 단순한 자영업이 아니라 지역의 정착 인프라라는 뜻이다.


해외에서도 Local/Regional Entrepreneurship는


‘지역의 경제구조와 일자리, 심지어 인구유지까지도 좌우하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요약하면 로컬창업은:


• 인구정책 측면에선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바닥층이고,


• 지역경쟁력 측면에선 “생활권을 유지하는 저변”이다.


지역의 골목이 텅 비어 있다면,그 지역은 이미 산업이 아니라 삶의 단위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 로컬크리에이터 - 문화적 경쟁력을 부여하는 ‘감각의 층’


로컬크리에이터는 한 단계 위, 문화적 경쟁력의 층을 담당한다.


로컬크리에이터 지원사업은 ‘지역 고유의 특성과 자원을 기반으로 혁신적 아이디어를 접목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정리하면 지역자원 × 창의성 × 브랜드화의 구조가 가능한 경우다.


세계적으로 논의된 ‘크리에이티브 클래스(creative class)’ 개념과도 닿아 있지만, 한국에서는 조금 다르게 작동한다.


크리에이티브 클래스는 미국 지역학자 리차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 가 창안한 개념이다. ‘3T’ 모델, 혁신/기술(Technology) + 인재(Talent) + 개방성·관용(Tolerance)이 지역의 창조·경제 역량을 만든다는 접근으로 도시경쟁력과 성장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창의적인 이들이 지역의 분위기와 경쟁력을 바꾼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한국의 로컬은 그 창의성 위에 지역 고유의 자원·생활문화·관계인구가 겹쳐진다. 그래서 한국의 로컬크리에이터는 창조계급의 지역 버전이라기보다, 지역의 감각과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독자적인 층위에 가깝다.


로컬크리에이터는 바로 이 ‘창의적인 계층’이 대도시가 아닌 지역으로 분산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인구정책 측면에선 관계인구(related/relational population)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일본이 인구정책에서 ‘관계인구(관계 인구, kankei jinko)’ 개념을 도입한 것도 ’완전 이주가 아니어도, 반복적으로 관계 맺는 사람들’이 지역의 지속성에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지역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도시의 이미지, 브랜드, 정체성을 설계하는 층이 그 범주에 들어간다.


로컬크리에이터가 만든 카페, 서점, 공간, 축제는 행정 문서로는 만들 수 없는 도시의 첫인상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로컬크리에이터는 ‘동네의 감각을 설계하는 사람들’이다. 이 감각이 쌓일수록, 지역은 지역성(territoriality)이라는 문화적 경쟁력을 갖게 된다.


- 로컬벤처 - 성장 동력을 책임지는 ‘엔진의 층’


로컬벤처는 성장 동력을 책임지는 가장 윗층이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벤처는 단순히 ‘지역에서 시작한 기업’이 아니다. 기술과 디지털, 딥테크를 기반으로 고성장 가능성을 증명하고, 무엇보다 외부 자본(VC, AC 등)을 끌어올 수 있는 ‘투자 수용성’을 갖춘 기업군을 뜻한다.


냉정하게 말해, 스케일업이 고려되지 않은 로컬벤처 정책은 ‘고급 창업 교육’ 수준에서 멈추기 십상이다.


지역 안의 자금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로컬벤처가 진짜 엔진이 되려면, 지자체는 단순 보조금 지원을 넘어 로컬 펀드 조성, 민간 투자 유치(IR) 기회 제공, 그리고 규제 샌드박스 적용 같은 '금융과 제도'의 영역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 층이 단단해질수록 지역에는 고학력 청년들이 선망하는 질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역외 자본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로컬벤처는 지역이 ‘살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자본과 인재가 모여 성장하는 곳’임을 증명하는 핵심 장치다.


- 세 층이 만나야 지역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러 연구와 정책을 겹쳐놓고 보면, 결론은 오히려 간단해진다.


로컬창업은 지역 생태계의 ‘저변’을,


로컬크리에이터는 ‘문화적 경쟁력’을,


로컬벤처는 ‘성장 동력’을 담당한다.


지역 생태계는 이 세 가지가 선순환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로컬창업이 생활권과 정착 기반을 만들고, 로컬크리에이터가 관계인구와 도시의 매력을 쌓고, 로컬벤처가 질 좋은 일자리와 산업 전환으로 미래의 인구와 자본을 붙잡는다.


셋 중 어느 하나만 키워서는 지역이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갖기 어렵다.


‘로컬’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 지금이야말로


이 셋을 분명히 구분해서 각자의 층에서 제대로 설계해야 할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


이제는 ‘로컬을 지원하겠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라다. 적어도 이런 질문이 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지금 우리가 하려는 건


저변(로컬창업)을 떠받치는 일인가, 문화적 경쟁력(로컬크리에이터)을 키우는 일인가, 아니면 성장 동력(로컬벤처)을 다지는 일인가.


•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보강해야 할 층은 어디인가.


• 세 층이 연결되는 구조는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


50장의 강의안을 줄이고 다듬으며 내가 마주했던 것은, 결국 ‘언어의 장벽’이었다.


현장은 이미 층층이 분화하며 치열하게 생존법을 찾고 있는데, 정책의 언어는 여전히 ‘로컬’이라는 뭉텅이 단어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행정의 문서와 현장의 풍경, 정책의 예산과 창업가의 마음—이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언어를 맞추는 작업이 곧 내가 생각하는 ‘로컬의 재구성’이다.


책상 위의 공고문이나 자료가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될 때까지, 더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이 구조를 기록하고 전달하려 한다.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살고 싶은 지역’은 지도 위의 점이 아닌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