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월을 천천히 걷는다는 것

나의 소소한 제주 생활 : 4.3, 동백 그라고 동박새

by 고미


4월이다. 제주의 4월이다.

4.3과 지방선거가 엉키는, 그럴 때라 여러 말들이 오간다.

하지만 오늘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하나였다.


“오늘, 우리는 조금 천천히 걸어봅니다.”

제주올레가 넘긴 이 문장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묻는 방식에 가깝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지연이 아니라 선택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4월의 제주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꽃이 피어도 먼저 웃지 않는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아래에 쌓인 시간과 기억이 함께 올라오기 때문이다.


제주 동백은 툭 떨어져, 땅에서 피는 꽃이다. 그래서 이 계절의 기억은 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자리, 남겨진 자리에서 돋는다.



제주4·3은 오랫동안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이 사건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제주사람 10중 1명이 까닭없이, 이유도 모른채 목숨을 잃었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를 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억을 ‘알고 있는 것’과 기억을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최근의 장면들은 종종 이 간극을 드러낸다.

기억을 말하지만, 그 말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기억은 원래 조용한 일이다. 앞에 서기보다, 옆에 서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은 메시지의 크기가 아니라

태도의 정확성이다.



그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 건 오늘 함께한 시간이었다.


북촌 너븐숭이를 걸을 청년 발달장애인들과의 자리였다.

관련한 어떤 전문 강사가 아니어서,

부탁을 받고 선뜻 나섰지만 솔직히 고민과 걱정이 많았다.


과하지 않을까,

너무 무겁지는 않을까,

혹은 누군가에게는 무섭게 남지 않을까.


그래서 한 가지에 집중했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끝까지 함께 걸을 수 있도록.



복잡한 설명 대신 이야기를 건넸다.


동백이 남기고,

동박새가 전하는 것.


동백 꽃 송이만한 작은 새는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며 꽃가루와 씨를 옮긴다. 보이지 않게 이어주는 일을 한다. 그래서 다음 꽃이 피어난다.



그래서 오늘 제주4.3을 알고 해야할 일을 아는 우리 모두는 동박새라고 얘기했다.


각자의 가슴 높이에서, 각자의 언어로

알고, 말하고, 전하는 일.


크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


전해들은 얘기지만 오늘 너븐숭이를 천천히 걷는 동안 저마다 하나씩 동박새의 역할을 찾았다.


돌 하나,

바람 하나,

이름 하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4·3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앞에 서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옆에서 이어야 한다.


그 역할이 빠진 기억은 쉽게 소모되고, 빠르게 잊힌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결국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서두르지 않고, 지나치지 않고, 남겨진 것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선택.



오늘, 나는 그리고 우리는 조금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 속도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분명해졌다.

동백이 남긴 것을 동박새처럼 전하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