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사나 신물질로드-물옷 이야기 하나.
지금은 서너시간 물에 있어도 거뜬할 만큼 '성능이 좋은'고무옷이 반 무상으로 보급된다. 행여 바다 작업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까만 색 일색이던 옷에 형광색을 가미한 유광 작업복도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고단한 물질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을까. 사정은 그렇지도 않다. 작업 전 주먹만큼 쏟아붓는 약의 양도, 병원을 찾는 횟수도 늘었다. 옷은 시절을 타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한 까닭이다. 노 해녀에게 오래 물질을 할 수 있는 기능 좋은 고무옷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헛웃음이 난다.
'그 힘들걸 어떻게 말로 다해'
"예전에 뭐 옷이란 게 있었나. 무명으로 물옷을 만들어 입은 게 전부지. 누가 보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야.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얼마나 추운지. 아이고. 그 힘든 걸 어떻게 말로 다 해"
해녀를 만나 물질에 대해 물으면 녹음이나 한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이 있다. 과거 힘들었던 이야기는 기본이다. 어떻게든 물건을 건져내야 먹고 살았다. 작업복이란 의미도 나중에야 만들어졌다. 당시는 구하기 쉬운 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간신히 가릴 정도의 옷을 만든 것이 전부였다. 질기고 물에 젖어도 변형이 덜 한 것을 찾았다. 예전 만들어진 물옷 중에는 정부 보급품인 밀가루 포대로 만든 것도 있었다. 검정 물옷은 검게 염색된 옷감이 나오기 전까지 양잿물을 들여 만들었다.
1970년대를 전후해 고무옷이 보급되고 나니 물질 사정 역시 달라졌다. 바다에서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잠수병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무명옷을 입었을 때는 한 번 물에 들고 나면 적어도 20~30분은 쉬지 않으면 안됐다. 지금은 서너시간 물에 있어도 거뜬할 만큼 '성능이 좋은'고무옷이 반 무상으로 보급된다. 행여 바다 작업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까만 색 일색이던 옷에 형광색을 가미한 유광 작업복도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고단한 물질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을까. 사정은 그렇지도 않다. 작업 전 주먹만큼 쏟아붓는 약의 양도, 병원을 찾는 횟수도 늘었다. 옷은 시절을 타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한 까닭이다. 노 해녀에게 오래 물질을 할 수 있는 기능 좋은 고무옷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헛웃음이 난다.
1702년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용두암 해녀'들이 입었던 물소중이는 1970년 이전까지 모양이 조금 바뀔 뿐 세대를 이어 전해졌다. 가장 전형적인 작업복이다.
‘물소중이’는 ‘물(水) + 소(小)+ 중이(袴衣)’의 복합어이다. ‘중이’는 남자의 옷 중에서 여름 홑 아래옷인 ‘홑바지’를 부르던 말이다. ‘물소중이’는 물속에서 물질할 때 입는 작은 홑옷으로, 틀은 크게 몸통, 어깨 그리고 옆의 끈으로 나뉜다. 몸통은 가슴과 엉덩이 부분만 가리고, 팔과 다리가 노출되는 짧은 단벌 홑옷이다. 어깨는 가는 끈을 한쪽만 단 것과, ‘어깨(조끼)말기’를 단 것 두 가지가 있다. 끈을 단 것이 앞선 시기이다.
물소중이의 꼴(형태·모양)을 묘사한 기록 중에 조선 숙종 때 신광주의 ‘석북집石北集’(1840) 잠녀가(潛女歌)가 있다. 잠녀가에서는 이 물소중이를 작은 바지를 뜻하는 ‘소고小袴’라고 적고 있다. 오기남의 시 ‘잠부潛婦’에는 ‘달팽이잠방이(와곤蝸裩)’라는 표현이 있다.
물에서 작업을 할 때 입는 옷을 바지 형태로 만들어 몸을 보호하고 또 움직이는데 제약을 줄였다는 점을 보면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다만 당시 반상제(班常制)의 사회 통념상 그 의미를 읽기 보다는 하층민이나 입는 옷으로 평가 절하됐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어깨너머 전해진 실용과 합리의 지혜
그들만의 지혜도 엿볼 수 있는 것이 젖은 상태에서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매듭으로 여밀 수 있게 한다거나 한쪽 어깨만 끼워 입을 수 있게 한 특징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1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올해 85세 오복인 할머니의 얘기는 해녀옷이 품고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더 많음을 가르쳐준다.
해녀가 많았던 동네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물질을 했던 오 할머니지만 사실 그보다 해녀옷을 만들었던 기억이 구체적이다.
오 할머니의 어머니(고 강정생)는 물질을 하지 않았다. 해녀였었지만 오 할머니가 철이 들 무렵 이미 집에서 길쌈을 하느라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 다섯 남매 중 두 딸은 그 시절 아이들처럼 바다에서 놀면서 물질을 배웠다. 오 할머니의 언니는 실력이 꽤 좋아서고 했다. 오 할머니는 길쌈 심부름을 했다. 언니 만큼 물질 실력이 좋지 않았던 까닭에 조금이라도 생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쪽에 손을 내밀었다.
바깥물질 한 번 다녀오면 밭을 샀던 언니와 달리 오 할머니는 '큰 돈은 안됐지만' 목화를 재배해 실과 옷감을 만들고 그 것으로 해녀옷을 만드는 것을 배웠다. 고무옷이 들어오면서 해녀옷을 만들 일은 없어졌지만 그렇게 배운 손재주와 기술이 지금껏 남았다.
오 할머니의 기억을 정리하면 당시 해녀마다 최소 2벌 이상의 해녀복을 가지고 있었고, 바깥물질 갈 때도 챙겨갔다. 작업이 끝나고 비는 시간에 직접 손바늘질해 만들어 입곤 했다.
해녀옷을 재단할 때는 가능한 몸에 꼭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팁과 옷을 입는 방식에 맞춰 왼쪽 다리를 넣는 부분을 '산굴', 오른쪽 다리 쪽은 '죽은굴'이라고 부르는 것도 가르쳐준다. 옷태를 잡느라 배 부분을 조금 단단하게 하고 벗겨지거나 할 우려를 덜기 위해 어깨띠는 조금 사선으로 위치를 잡고, 두겹으로 굴 부분을 접어 모양을 잡는 기술까지 귀띔한다.
기억하는 것, 기록하는 것
서귀포문화도시 노지문화탐험대를 통해 찾아낸 것은 국립민속박물관이 만든 한국의식주생활사전에 정리된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은 제주도 복식의 민속학적 연구(고부자,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1), 제주도 여인들의 속옷에 관한 연구(고부자, 제주도연구3, 제주도연구회, 1986), 제주도 의생활의 민속학적 연구(고부자,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17-의생활(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6), 해녀연구(강대원, 한진문화사, 1973) 등을 참고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옷감은 집에서 짠 ‘무명’으로 했다. 무명은 집집마다 자급자족으로 생산되어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가장 서민적인 옷감이었다. 물소중이를 만들려면 무명은 여섯 자[尺], 소중이는 넉 자 있으면 된다. 옷 마름할 때 무명이나 삼베는 통폭[幅] 너비로 하는 것이 기본이다. 마름을 통폭으로 함은 옷감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알았던 지혜이며 최상의 걸작품을 만들게 된 기원이 된 것이다. 이 방법은 옷을 만들고 한 치의 조각도 남기지 않았다. 19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흔한 기계직 광목으로 바뀐다.
색은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주로 ‘흰 것’으로 만들어 입었는데, 차츰 광목과 물감이 흔해지면서 ‘검정색’을 입기 시작했다. ‘검정은 흰색보다 질기고, 무엇보다도 얼른 보기에 더러운 것이 나타나지 않아서 좋았다’라고 한다. 또한 어깨 끈에서 차이가 나는데, 흰옷은 어깨 한쪽에 끈을 달고, 검정 옷일 때는 대부분 ‘조끼(어깨)말기’로 하였다. 검정 옷은 재봉틀이 나오면서 흔해지고, 바느질도 더 단단하게 하였다.
치수재기는 특별히 ‘자’ 대신에 팔과 손, 손가락 마디로 했다. 손가락의 길이는 ‘뼘’, 첫째와 둘째 손가락 거리는 ‘조리’라 했다.
마름은 어떤 옷이든지 옷의 성패를 가르는 첫 관문이다. 물소중이 마르기는 매우 특별한 숨은 공식들이 있으며, 그 점이 물소중이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마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몸판잡기’이다. 몸판잡기는 가랑이 밑이 사방 180°가 되는 바른네모(직사각형)가 두 겹으로 겹쳐지게 잡았다. 여기에서 가랑이 밑이 두 겹 겹침은 지금의 ‘팬티’ 밑이 두 겹인 것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180°는 물질 때 하체를 최대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가 된다. 트임은 한쪽 옆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끈과, ‘모(아래아)작’ 또는 ‘돌(아래아)마귀’라고 부르는 ‘매듭단추’를 앞 판과 뒷 판 양쪽에 3~5개씩 달았다. 이들 끈이나 단추의 간격은 일반 적삼에 다는 것과 달리 길다. 이는 임신으로 배가 부르거나, 살이 쪘을 때 조절하기 위한 조치다. 허리를 달 때는 배가 큰 사람은 ‘굴가랑이’와 ‘배바대(처지)’의 치수 가운데 ‘처지’ 쪽을 넓게 잡도록 하고 ‘엇선(바이어스)’ 부분을 조금씩 늘인다. ‘허리끈’은 뒤쪽을 짧게 한쪽 허리 끝까지 하고, 앞쪽 것은 허리 한 바퀴를 돌고 배꼽까지 오도록 길게 한다.
특히 물소중이 트임을 한쪽으로 만 해 입고 벗을 때도 앉아서 한쪽 다리만 움직이면 되어, 다른 속옷을 입을 때처럼 엉덩이나 하체를 노출시키지 않아도 됐다. 이는 물질이 끝난 다음 옷을 갈아입을 때도 같다.
밀가루 포대로 만든 물소중이. 제주해녀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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