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물옷 이야기 둘.
지난 2008년 제주특별자치도는 해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제주잠녀의 물옷과 물질도구 15점을 '제주도 문화재 민속자료 10호'로 지정했다.
물소중이, 물적삼, 물체, 수건 및 까부리 등 물옷(해녀복)과 태왁망사리, 족쉐눈, 세눈, 눈곽, 빗창, 종개호미, 호맹이, 작살, 성게채, 성게칼, 질구덕 등 물질 도구는 해녀들의 삶과 밀접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재질이나 형태 등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하나의 역사가 됐다.
70년 물질 인생 변천 과정 녹아나
해녀들의 기억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고무옷'을 입기 전과 입은 후다.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물질 작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바당'에서만 70년을 살았다는 한림읍 수원 이정현 할머니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 할머니를 만난 것은 지난 2014년. 당시 구순이던 이 할머니가 물질을 시작한 것이 15살 무렵, 1930년대 후반이었다. 해녀들이 '속곳'차림으로 작업을 했던 시절이었다. '(물)소중이'는 1940년대 들면서 입기 시작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할머니의 설명대로라면 '속곳'은 말 그대로 '속옷'이고, 물소중이는 젖은 상태에서도 입고 벗기 편하게 어깨걸이를 단, 작업복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7세기 이건의 '제주풍토기' 「규창집」(1629)를 보면 '미역을 캐는 여자를 잠녀(潛女)라고 한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채취한다. 미역을 캐낼 때에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바다에 떠다니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 「속탐라록」에서도 '옷을 입지 않은 채로 작업하는데 부끄러움을 몰라 이것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1702년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 그려진 용두암 해녀 물질 작업 모습을 넘어 이후 제주의 풍속을 기록한 문헌들에 '소중의(小中衣)'라는 명칭이 언급된 것도 유의미하게 해석된다.
물소중이 위에 입는 물적삼 역시 1930년대 이후 입기 시작했다. 이 할머니도 '17살 일본 물질을 갈 때 처음 속적삼을 입었다'는 기억을 꺼냈다. 당시만 해도 물수건에 '족은 눈'을 쓰고 하던 작업이 일본을 오가며 헝겊 모자인 까부리 형태로 바뀌었다. 고무옷보다 고무로 만든 모자가 먼저 도입됐다는 얘기도 했다.
해녀 관련 기록들을 보면 까부리는 1960년대 일본이나 육지로 물질을 갔던 해녀들을 통해 제주로 들어왔다. 이 할머니의 기억은 이렇게 제주 물옷사(史)가 된다.
물숨 만큼 빨라진 변화 속도
이 할머니의 기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물소중이를 입을 때만 해도 겨울에는 물질을 하지 않았다. 한번 작업에 15분을 넘기기 힘들었다. "그냥도 이가 닥닥 하는데…. 고되기도 하고 추워서도 못해" 음력 3~4월은 돼야 해경을 해 미역을 조물고 작업을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면 여간해선 작업을 할 수 없었다.
해녀들의 오래된 궤에서는 무명옷을 여러 겹 누벼 만든 물체 같은 겉옷이 종종 발견된다. 너나없이 배고팠던 시설에 무명으로라도 물옷을 만들 수 있을 정도면 '살 만 했다'. 밀가루 포대 등 기워 만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됐고 검은색 물을 들이기도 했다.
물적삼이 일상화된 것도 1960년대 이후 일이다. 소매부리와 도련에 끈이나 고무줄을 넣어 몸에 맞게 조절했고 벌모작 단추로 앞을 여미게 하는 것으로 젖을 옷을 쉽게 벗을 수 있게 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시나브로 사라졌다. '작업'의 기준이 됐던 계절이며 시간 구분이 모호해졌다. 15분 남짓이던 작업시간이 한 시간에서 반나절로 늘어나고 '잠수병'도 생겼다.
이 할머니 역시 고무옷에 의지하면서 아이를 낳고 몸을 채 추스르기 전에 바다에 몸을 던졌고, 두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도리 고명순 해녀(67)도 고무옷 얘기를 한참 풀어냈다. 고무옷이 없을 때는 겨울에 바다에 가지 않았다. 추워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바람만 없으면 바다에 간다. 헛물질에 4~5시간은 기본이다. 작업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몸이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처음부터 모두가 '고무옷'을 입었던 것은 아니다. 바깥물질을 나간 잠녀들이 삯을 대신해 고무옷을 받았고 작업 능률이 높아지다 보니 하나 둘 입기 시작했다. 잠수회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무옷을 입으면 아예 작업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도 하는 등 마찰이 심했다.
팔만, 모자만 하는 식으로 하나 둘 구색을 맞춘 것이 지금의 형태가 됐다. 특히 '고가'다 보니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다. 1970년대 당시 한 벌에 20만원이 넘었다. 현재 가격도 물가 인상분과는 거리가 먼 27만원 안팎. 바다에 의지해 사는 해녀들로써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4개 시·군 체제이던 지난 1996년 남제주군이 가장 먼저 생활이 어려운 잠녀를 지원하기 위해 잠수복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른 시·군들도 해녀의 복지 증진과 소득 증대를 이유로 잠수복을 지원했다. 이후 2003년부터 '수산업법 상 수산관련 종사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어업인 지원 육성 규정을 근거로 전 해녀에 대해 잠수복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예산이 한정되면서 모든 해녀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면서 잠수회별로 자체 지원 규정을 만들어 가능한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있다. 해녀 수가 적은 곳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하도 등 잠녀가 많은 지역에서는 차례를 기다리는 데만 5~6년이 걸리기도 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19세기 말부터는 '눈'이라 부르는 수경이 '해녀옷' 목록에 포함됐다.
1970년대 고무옷의 등장은 물질 행태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고무옷 착용으로 작업 속도나 생산량은 분명 늘었다. 이 부분은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플러스일지 모르지만 산업화 바람에 허물어졌던 불턱을 다시 쌓아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만들어냈다.
지난해 11월 평대어촌계를 찾아갔을 때는 눈에 띄라고 나눠준 오렌지색 잠수복 대신 구모델인 검정색 고무옷을 입은 해녀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작업할 때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귀띔이 따라온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부담이어서 각종 접착제를 동원해 수선하고 작업이 없을 때는 제일 먼저 손질해 훈장처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예전에는 돈벌이가 됐을지 몰라도 요즘 같아선 고무옷 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정 뒤로 정(情)때문에 가게 문을 여는 '삼춘'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지난해 서귀포 문화도시 노지문화탐험대는 장롱 안에 곱게 보관했던 기억을 찾아냈다. 올해 86세인 송임생 할머니가 예전 직접 입고 작업을 했다는 검정색 해녀복이다. 50여년의 시간을 지나 세상에 나온 것이지만 기억을 먹고 새것처럼 빛을 낸다.
요즘 길을 낸다면 자동차가 다니기 편한, 조금 신경을 쓰면 보행자 편의를 살핀 반듯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해녀와 해녀문화를 통해 내는 길은 바다를 닮았다. 마치 호흡을 하듯 고르게 이어지기도 하고 조금 거칠어도 거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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