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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n 10. 2022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그냥 제주 살아요- 김기삼 기증전 ‘재일제주인, 그들의 이야기'

흑백 사진 속에서 그들이 본다. 지난 세월을, 눈앞의 현실을. 무심하게 들이댄 카메라 렌즈가 낯설고 불편할 만도 한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덤덤하게 마주하거나 피하는 시선이 아리다.

어쩌다 조금 늦게 전시장에 들렀다. 기록 사진이 그러하듯 금방이라도 쿨럭쿨럭 마른 기침을 쏟아내고 오래 쓰지 않아 잠긴 목소리가 질책처럼 들린다. 그 때를 살았던,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살아 남아야 했던 이들이 사연은, 평범했을지 모르나 역사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김기삼 작가가 담아낸 재일제주인의 모습은 그동안 봤던 것들과는 조금 다른 톤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은 재일제주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사진이 많았다면 그의 사진은 교토에 주소를 둔 이들의 3·4세를 아우른다. 단순히 어디에서 사는 누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왜 찍었는가’가 다르다.

김기삼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먼저 일본에 자리 잡은 친척들과 인연을 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집안 어른의 제안도 있었지만 일본에 건너가 돈을 벌 기회를 놓치기에 당시 사회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마침 사진을 좋아했던 사촌형이 있었고, 사촌형의 일본인 친구와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일이, 20대 청춘에게는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열정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살고 돌아와서도 시간을 허투루쓰지 않았다. 제주4·3을 비롯해 다양한 제주 모습을 담아냈던 그가 일본에서 찍은 기록 사진을 제주대학교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주대학교 재일제주인센터 개교 70주년과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재일제주인, 그들의 이야기-우리 이렇게 살앗수다’ 김기삼 작가 기증 사진전은 그렇게 열렸다.

제주대학교 중앙도서관 로비와 문화교류관(박물관) 1층 중앙홀에서 열린 전시에는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일본 오사카와 교토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제주인들의 삶의 애환을 담아낸 사진 70여 점이 낮은 목소리를 낸다.

일제 강점기 떠밀리듯 끌려와 돌아가지 못했던 1세대부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어려웠던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정을 남 일처럼 느끼는 4세대까지, 다양한 얼굴이 나온다.

방적공장에서 13시간을 일하다 달을 보면 고향 생각이 나 많이 울었다던 한 할머니의 사연을 작가는 사진집 ‘달 보멍 하영 울었주(1999년·도서출판 각·달 보면서 많이 울었죠)’로 정리한 적이 있다. 머나먼 타국에서 현지인들도 마다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차별까지 받았던 이들의 사연이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나 먼저 다 듣지 못했던 얘기를 듣고, 몇 해 더 지난 순간을 남겼더랬다. ‘밤에 달을 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작업을 했다고 했다.


전시장에 나와 있는 사진들도 하나같이 사연을 담고 있다. 물질하러 현해탄을 건넌 13살 소녀는 지금은 허연 머리에 우리말은 몇 마디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15살에 밀항으로 고향을 등졌던 소년은 다시 돌아갈 이유를 잃고 “이대로 괜찮다”고 말한다. 기모노를 만드는 옷감에 손으로 무늬를 넣는 보카싱 작업을 대를 이어 하고 있다는 제일 제주인 2세도 있다. 경계인으로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이름도 여럿 등장한다.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의 시간과 삶이다. 조금만 더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이제는 멈췄거나 희미해져 사라져간 것들 사이로 탱 탱 방울이 울리고 ‘에헤 에헤에에 너화 넘자 너화 너’하는 상여꾼들의 받는 소리가 섞인다.

좀 더 다가가니 희망가 한 대목이 구성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 재일제주인의 기록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재일 제주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제주인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동기는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해 토지를 잃거나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이 노동 시장에 취업하기 위한 이주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제주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10년대 세부 측량과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신작로 건설, 어업의 침탈 등으로 제주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제주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법정사 항일운동이 발생하여 더 이상 제주에서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제주도민들은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노동 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제1위의 공업 도시였던 오사카는 제주도민에게 가장 중요한 노동 시장이었다.     

1920년경부터는 제주인들의 공동생활이 시작되면서 제우회(濟友會) 등 상조 모임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제주인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취직을 꺼리는 고무공장 등에 취직했다. 1924년 당시 노임은 하루 20~45전(당시 담배 6전 정도)으로 노동 현실은 대단히 피폐했다. 1925년을 전후하여 이쿠노구에는 다른 지역 출신의 한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제주인들은 이들로부터 ‘섬놈’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하는 이중적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판 동부의 신흥 공업 지대는 1920년대 초와 1930년대 초 고무 공업이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그 발전을 지탱한 노동력은 한국인 중에서도 제주 지역 출신자들이었다.     

1930년대는 제판 항로(濟阪航路) 이용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다. 당시 왕복 항로 이용자의 평균은 연간 3만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성들은 주로 방직공으로 일했고 남성들은 노동을 했다. 오사카 지역에 이쿠노구를 가로지르는 평야운하 개설공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제주 출신 중에는 이들 노동자를 수용하는 식당을 경영했던 이들도 많았다. 1940년대 들어 일본 전시 체제와 맞물리며 징용과 군 요원으로 차출하기 위한 징병이 강요됐다.

해방으로 많은 재일 제주인들은 제주도로 귀환하였으나 일본에 그대로 정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제주 4·3을 전후한 시기에 대략 5000~1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밀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중에 1959~1961년 북송사업이 한창일 때 북조선으로 건너간 경우도 적잖아 재일 제주인 사회 또한 이념적으로 양분되는 현상을 보였다.

1961~1970년대는 일본의 고도 성장기로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시기여서 경제적 이유로 밀항을 하는 사람들 수가 꽤 됐다. 이 시기 제주인들은 정부에 의해서 가공된 재일 제주인 정보로 인하여 심한 정신적 피해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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