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밥 6기 에디터가 되다19- 꿈과 현실, 번아웃-보어아웃
일단 고백부터 하고 시작하자.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수가 오늘을 사는 이유가 내게도 있었다. 인정받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제동이 걸렸다. 멈칫하거나 덜컹거리는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은 그 수위가 꽤 높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Why me’를 외치고 있다. ‘다들 한 번쯤 그럴 때가 있지’하는 섣부른 위로 같은 것은 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지금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주섬주섬 손뜨개 준비물을 꺼내 들었다.
‘일단 좀 쉬자’는 주문을 중얼거리지만 마치 다른 세계의 말처럼 이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강제 Off 시도도 안 먹힌다. 어쩌면 ‘내 스스로 그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래 된, 지금은 클래식이란 수식어가 달린 영화 한 장면이 생각났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속에서는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고 삶의 막장에 다다른 마흔살 남성이 철로 위에서 절규하는 소리가 왜 귓가에서 미친 듯 쨍쨍거리는지. 이건 아니지 싶어 머리를 이리저리 탈탈 흔들었다.
최근 나온 자료 몇 개가 개인적인 사정과 어우러지며 답 안 나오는 고민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대기업 때려치우고 스타트업 왜 갔나'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1위였다. 명함 관리 전문 앱(애플리케이션) '리멤버'를 운영 중인 드라마앤컴퍼니가 이용자 중 대기업·중견·중소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500명을 대상으로 질행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답은 '다양한 업무 기회에 대한 기대감(37.1%)'이었다.
업무 역할과 권한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스타트업의 특성상, 업무를 통한 경력 개발 가능성에 크게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어 금전적 보상(28.6%), 업무 문화(12.7%), 함께 일하는 동료(6.8%), 더 많은 업무 권한(6.2%), 기타(1.3%) 순으로 대답했다.
또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결심한 후 고려했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5.6%가 '회사의 성장 가능성'을 꼽았다.
연봉 등 금전적 보상(17.9%)까지는 고려대상이었지만 업무 문화(8.8%), 함께 일하는 동료(6.8%), 회사의 투자 유치 금액(4.4%), 복지 제도(3.1%), 기업의 인지도(2.3%) 등은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연봉 등 금전적 보상'에서는 이전에 근무했던 기업 규모에 따른 차이를 읽을 수 있었다. 대기업 재직자의 경우 중견·중소기업 재직자 대비 연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율이 2배 더 높았다. 실제 스타트업으로 이직할 때 연봉을 낮춘 경우는 응답자의 13.8% 수준이었다. 반면 49.3%는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됐다고 답했고, 기존보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고 응답한 비율도 19.5%나 됐다. ‘이전 회사와 비슷한 수준’에 체크를 한 17.4%까지 사실상 스타트업이 개인의 커리어를 키우고 실질적으로 몸값을 높이는 유망한 이직처로 인식되고 있음을 반영했다.
스타트업이라 인력 채용이나 관리가 여유가 있는 걸까.
중소벤처기업부 자료를 보면 국내 벤처·스타트업이 지난 1년간 일자리 6만8000여개를 새로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 14개사는 1년간 평균 220.9명을 신규채용하면서 일자리 3000여개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6월 말 기준 벤처·스타트업 3만4362개사의 고용보험 가입 현황 분석 자료다. 증가율은 9.7%로 우리나라 전체 기업들의 고용 증가율인 3.3%보다 3배 높았다.
벤처·스타트업이 새로 만든 일자리 중 22.4%인 1만5136명은 만15세 이상 29세 이하인 청년의 몫이었다. 국내 전체 청년 일자리 증가량인 2만9948개의 50.5%에 해당하는 규모다.
여성 고용에서도 벤처·스타트업이 적극적이었다. 증가한 일자리 중 42.2%인 2만8536명이 여성으로 나타났다. 여성 고용을 증가율로 보면 12.9%로 국내 전체 여성 고용 증가율(4.2%)과 비교하면 3배 이상이다.
업력이 1년이 채 안되는 스타트업들도 평균 9.1명을 신규로 채용했다. 올해 창업한 벤처·스타트업 92개사가 6월 말까지 고용한 인원만 836명이다.
이 자료의 결론은, ‘코로나 위기에도 신설된 벤처·스타트업들이 고용 증가에 기여한 만큼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창업 정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이다.
유니콘 기업 중 분석 대상에 속하는 14개사는 3092명을 신규 채용했다. 기업당 평균 220.9명을 신규채용한 것으로 고용 증가율은 39.4%이나 됐다.
여기까지 보면 긍정적 시그널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취업자수가 계속 늘고 있는 것은 맞지만 6·7월 증가폭은 제자리 걸음 수준으로 보는 것이 맞다. 심지어 7월 취업자의 절반은 60세 이상이다. 말 그대로 예산을 투입해 만든 공공일자리 효과다. 20·30대는 늘었지만 40대는 줄어드는 이른바 허리가 불안한 상태다.
한 언론사가 진행한 삶 만족도 조사(20∼60대 남녀 1542명 대상)에서 응답자의 34.7%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밝힌 사정도 신경이 쓰인다. 20∼30대인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경우 43.9%가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응답해 다른 세대보다 피로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번아웃을 겪었다고 응답한 이들은 번아웃 증상으로(복수 응답)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43.4%) ‘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하고 우울하다’(43.0%) ‘일을 마치거나 퇴근할 때 완전히 지쳐 있다’(37.7%) ‘이전에는 괜찮던 일에 짜증이 나고 불안해진다’(35.1%) 등의 다양한 병리적 증상을 토로했다.
20대는 번아웃을 느끼는 이유로 남들과의 비교(39.8%)와 완벽주의적 성향(35.0%)을 가장 많이 꼽았다. 30대에서는 성공에 대한 압박(35.5%)을 꼽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아하 이런.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있다. 직원들의 워라벨을 인정하지 않는 기업을 부도덕하게 바라보는 시각이다. 열악한 근로조건이나 사업주의 개인적 목적의 업무 지시 등은 비판받아야 마땅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워라벨이 쉽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에 대해서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버티기 어렵다.
스타트업이라고 하면 미국식 수평적 업무 문화, 자율적 근무 여건, 혁신적인 이미지를 연상하는 상황 역시 스타트업에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제 스타트업은 창업자의 도전정신을 기반으로 기존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재무적으로 취약하며, 성공 불확실성도 높다. 투자자를 설득해야 하고, 서비스를 빠르게 출시해 가설을 시장에서 증명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 구체적 실현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보니 워라벨이란 단어를 생각처럼 꺼낼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안으로 워케이션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이 등장하지만 다양한 케이스나 니즈를 소화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루가 멀다고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고민 하나를 더 얹는 것이 맘 편할 리 없다.
덕업일치, 일잘러, 일과 삶의 조화로 몰입을 강조하는 ‘워라블(일과 삶의 혼합·work and life blending)’을 강조할 배짱 같은 것도 없다.
그래서 ‘팜 스프링스’이다. 머리에 이어 가슴에까지 바람이 든 탓에 종종 잠 대신 고르던 것 중 하나다.
하루에 갇혀 반복되는 하루를 살고 있는 나일스(앤디 샘버그)의 이야기다.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이야기는 사실 흔하지만 이 영화에는 뭔가 다른 포인트가 있다. 한 남자가 하루를 반복하며 산다는 설정에 그 하루를 똑같이 반복하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예상 가능한 하루를 사는 일은 오히려 삶을 무력하게 만든다. 나름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하지만 그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무한루프가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우연히 로이(J.K.시몬스)와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가 반복되는 하루에 들어온다. 세 명에게는 무수한 하루가 반복된다. 다른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하루를 세 사람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공유한다.
등장인물들에 집중하면 무한루프의 이유를 찾으 수 있다. 나일스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서 반복되는 하루에 안주하게 된다. 세라는 어쩌다 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과 바람을 피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삶에서 가장 우울하고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없는 시점에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게 되는 상황에 좌절했다면 그냥 글루미(Gloomy)한 영화로 끝났을 테지만, 두 사람은 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간다. 대단한 결말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최악의 하루였고 외롭게 느껴지는 하루를 새로움을 경험하는 기회로 바꾸는 모습에서 대리만족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반복되는 삶을 그저 견뎌내며 버틸지, 다 터뜨릴 용기로 새로운 시간을 흐르게 할지에 대한 고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마치 타임루프에 빠진 것처럼 인내심의 임계치를 확인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특별한 변화를 꿈꾸면서도 정작 익숙한 일상의 권태를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나 자신이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 실망하고 지친 사람이라면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운이 없는’ 또는 ‘나에게만 냉혹한’현실로 해석하곤 한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거란 생각은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이 영화가 느닷없이 가슴에 안긴 것은 그들이 '오늘' 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무한루프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내일'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다. 슬프거나 아플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한 발 더 내딛는다.
번아웃 얘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보어아웃(Boreout)이다.
보어아웃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업무로 인해 열정과 의욕을 잃고 도전 의식 없이 일하는, 무기력증을 말한다. 업무에 과도하게 몰두하다 쌓인 피로로 인해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는 번아웃 증후군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2007년 스위스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필리페 로틀린(Philippe Rothlin)와 페터 R. 베르더(Peter R. Werder)의 저서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다양한 현상 연구가 진행됐다.
현재 하고 있는 업무가 목적과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단조로운 환경에서 동기부여가 없이 일하거나 오랫동안 도전 없이 일하는 것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특정한 산업 분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닌데다 사실을 인식했을 때 이미 만성화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특징이다.
보어아웃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무실 책상에 앉아 온라인 쇼핑이나 동료들과의 대화 등 업무 외의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행동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무력감과 무기력함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해석할 수 있다.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직한 경력자는 산재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허니문’이후의 포지션(기대와 경계의 사이 쯤) 등이, 신입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현실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번아웃(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캔디 신드롬이나 곤란한 일을 애써 피하려 들다 탈진하는)이 아닌 보어아웃으로 이끌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극복을 위해서는 ‘동기부여’라는 장치와 임금님귀를 외쳤던 ‘대나무숲’을 둘 것을 조언한다. 살자는 일이다.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다. 잘 생각해보면 ‘스타트업’이라고 꼭 창업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으키거나 나선다는 뜻으로도 쓴다.
‘답’까지는 아니지만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변화하는 사회 흐름과 조직 체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같은 질문의 홍수 속에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을 조심스럽게 옮겨본다. 왜 일해야 하는지,
“너 자신을 알라”라는 오래된 격언은 삶이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따르기가 참으로 힘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알라”라는 말은 원한다면 누구든 따를 수 있다. 이는 일에 기여하며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조용히 누구나 마음 속에 하나씩은 품고 있는 ‘팜 스프링’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