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임경석 '독립운동열전'1,2
잠깐 잊고 있었다. 분명 신문 기사를 읽고 ‘단단히 기억하고 있으리라’했던 일 자체를 말이다.
책을 펼칠 때마다 신중하게, 그리고 가능한 차갑게 살피는 것이 글쓴이의 말이다. 어느 정도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 글을 마주하는 습관이 이번처럼 무섭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몇 번을 다시 읽고 또 읽고 좀처럼 ‘진도’를 빼지 못했다. 푸른역사의 독립운동 열전 1·2다. 1은 잊힌 사건을 찾아서, 2는 잊힌 인물을 찾아서 움직인다. 글쓴이의 의도를 알고 같은 방향을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살펴야 할 의무는 당연했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제’라는 단어는 마치 바늘처럼 심장을 찔러댔다. 지금껏 내가 알고, 알려고 했던 것들에 대해 “왜?”하는 질문을 마구 해대는 느낌이었다. 전시용 동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처리하는 기술은, 심장까지 뛰게 하지는 않는다. 간혹 위협적이기까지 한 위압감이 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저자가 살핀 것은 영웅 서사라는 큰 기둥에 가려 있던 그늘, 업적을 부각하기 위한 작업들 속에 마치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깎아놓은 것처럼 반들반들 형태를 잃은 이름들이다.
우연처럼 안 것들에 숨을 삼키고, 운명인 듯 찾아 헤매며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이미 알려져 있거나 공적인 자료들은 간혹, 저자의 말처럼 지루하고 권태롭다. 새로 찾은 것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두려워진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 마주하는 것들에 제대로 눈을 맞춰야 보인다. 누군가 대신 닦아준 길을 따라 만난 것이 더 소중한 이유다.
직업병 작동으로 그 안에서 #신문과 #기자에 꽂힐 줄이야.
‘김단야’라는 이름의 붉은 꽃이 예상보다 강렬하게 불붙었다.
국내외 정세에 밝고 문장력이 좋았으며 외국어 능력도 출중했던 그는, 그 모든 능력을 발휘하는 기자였다. #제주도 라는 키워드까지 적절하게 작동한다.
“조금씩 흔들리던 선체는 아주 자는 듯이 침착하여졌다. 둥그런 유리창을 통하여 멀리 푸른 물결 저편에 뫼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이 겨우 곤한 잠을 채 깨지 못한 나의 시선을 물들인다. 나는 정신을 차려 한참 주목했다. (중략) 과연 큰 섬이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산이었다. 그 섬이 즉 산이오, 그 산이 즉 섬이었다. 그것이 곧 제주도인 한라산이오, 한라산인 제주도이었다.”
김단야는 남해 먼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 로쿠칸마루 선상에서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실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일본 모지항에서 출발하여 49시간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1924년 12월30일 오후 2시에 출항했으므로, 상하이 도착 예정 시간은 해가 바뀌는 1925년 1월1일 오후 3시였다.
그는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고국 사랑을 느꼈다고 썼다. “아! 저것이 과연 제주도이다. 나의 고국의 산천이다”라는 탄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저 땅에서 발을 옮겨놓은 지가 불과 3일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경성을 떠난 것이 3일 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새삼스럽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식민지 통치하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싣는 글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표현이었다.
그 #기자 라는 단어로 아드레날린을 분출했던 일은 올 초에도 있었다. 올해로 90주년인 제주해녀항일운동에 대한 자료를 뒤적일 때의 일이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의 부당한 경제적 차별과 수탈, 그리고 억압에 저항한 조직적인 투쟁으로써,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제주 3대 항일운동의 하나로 꼽힌다.
당시 해녀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이유는 넘쳤다.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정리해보면 1930년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해조류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녀들도 함께 저항하기 시작한다. 그에 앞서 성산 지역에서도 해조류 가격을 후려친 해녀조합의 횡포에 지역 청년들이 들고 일어섰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우야무야 정리되고 난 이후 다시 비슷한 일이 발생하자 더 이상 참고 견딜 일이 아니라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1931년 12월 부춘화(1908~1995)·김옥련(1907~2005)·부덕량(1911~1939) 해녀가 하도리 해녀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이들은 해녀들을 모으며 시위에 앞장섰고, 인근 마을 해녀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글을 돌리기도 했다.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요구조건을 이루기 위해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했다.
이후 일제의 무장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미결수로 수 개월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이 일은 제주에서 독립에 대한 뜻을 모으던 ‘청년’들을 색출하는 카드로 됐고, 치밀한 색출 작업 끝에 제주에서 벌어진 ‘어떤 일’로 조용히 정리된다. 실제 1933년이후 언론 자료에서는 제주 해녀라는 말은 뒤로 밀리고 제주 비사(秘社)사건 또는 제주도사건으로 다룬다. 이 과정에서 해녀항일운동의 배후에 있었던 혁우동맹의 존재가 드러나고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들의 색깔로 인해 ‘공산당’으로 분류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해녀투쟁을 배후에서 지도한 혁우동맹원 신재홍·문도배·오문규·강관순 등의 판결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앞서 나열한 이들 모두의 직업은 ‘기자’였다. 농업 등으로 겸직한 경우도 있었지만 해녀항일운동의 전 과정을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음은 특별하다. 이들은 1931년 9월에 조선일보 성산포분국에서 회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보다 해녀투쟁의 전말을 더욱 상세하게 다뤘던 배경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조선일보 기사(1933. 2. 8)에는 ‘혁우동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농촌 대중과 해녀 획득에 활약하여 공산주의 기본 대중의 토대를 건설하던 바 ······ 구좌면 해녀‘데모’를 총지휘하여 조선 초유의 큰 항쟁을 발생시켰다 한다‘고 해녀항일운동과 혁우동맹의 연관성, 항쟁의 특성 및 규모 등을 서술한다.
연구자들 중에는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해녀항일운동의 전개 과정을 볼 때 표면적으로 직접 항일이나 독립을 지향하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기도 한다. 해녀들의 움직임은 해녀조합의 해산물 저가 매수와 각종 횡포에 대해 권리와 생존을 위해 투쟁한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기사 내용 역시 혁우동맹원들은 이 사건을 배후에서 있으면서도, 비밀 결사조직과 다수 해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과의 연관성을 숨긴 채 자연발생적인 경제 투쟁으로 기술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를 살지 않았으니 무엇이 맞는지, 아니면 틀렸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강관순 애국지사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해녀의 노래’ 가 투쟁 당시 불렀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 여기까지. 김단야의 ‘제주도’ 는 우리나라, 우리땅에 대한 감회라고 해석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상하이에 가는 노정에서 겪은 일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의 삶과 역사를 녹여내는 기사에 내 나라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옮겨낸다. 기자여서 가능했던 것을 아끼지 않고 펼쳐낸다. 무거워진 머리와 가슴이 버거웠지만 이런 허리 펼 틈이 있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밀결사에 참여했던 경험을 '가두 연락의 첫날'이란 작품에 녹여냈던 여인, 송계월 역시 잡지사 #기자였다. "혹시 벌써 지나쳐 버리지나 않았을까 싶어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도중에 상대방이 붙잡히지는 않았나. 만나는 장소에 밀정이 있으면 어찌하나. 공포심이 제어할 수 없이 솟아 올랐다"
읽지 않으면, 아니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한 호흡에 책을 읽어내고 드문두문 표시해둔 부분을 다시 읽는다. ‘김철수 노인의 지갑에는 한 여인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다음 계단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