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 누가 부겐빌레아의 꽃을 보았는가
코로나19로 못했던 것이 더 많았던 2020년과 2021년이었다.
패션 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컬렉션이 코로나19로 인해 존폐의 위기를 맞았다. 그 시발점은 2020년 2월 뉴욕 패션 위크(2월 4~12일) 였던 것 같다. 뉴욕 패션 위크 후 런던(2월 14~18일)과 밀라노 컬렉션(2월 18~24일), 파리 패션위크(2월 24일~3월 3일)까지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급하게 일정을 취소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손해가 발생됐다. 컬렉션 혹은 프레젠테이션을 포기하는 브랜드가 속출했고, 패션쇼는 강행했더라도 쇼 이후 바이어와 기자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취소하거나, 온라인상으로 주문과 홍보 자료 배부를 진행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브랜드들도 계획했던 각종 대형 패션쇼와 이벤트들을 줄줄이 취소했다. 다양성에 대한 담론이나, 환경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이 되는 지속 가능성 같은 콘셉트를 통해 다음 스텝을 예측해왔던 모든 것들이 ‘비대면(Untact)’이라는 새로운 변수와 만났고, 온라인 플랫폼 확장이라는 새 판이 깔리기 시작했다. 럭셔리 브랜드의 대명사 C가 같은 해 3월 파리 그랑 팔레에서 진행한 2020 F/W 여성 기성복 컬렉션을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한 것은 어쩌면 환경 변화를 거스르지 않은 결과였다.
-핑크빛 이야기
가방, 의류, 향수, 선글라스, 주얼리, 시계 등을 제작·판매하는 프랑스의 대표 패션 기업인 만큼 온라인이라고 허투루 접근하지 않았다. 수석 디자이너 버지니 비아르는 만인의 꿈을 온라인을 통해 펼치는 것으로 C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2020/21 크루즈 컬렉션 ‘지중해에서의 산책(Balade en Mediterranee)’은 마스크가 장악한 퍽퍽한 일상에 색을 입히고 여유와 자유라는 힐링 코드를 과거의 향수와 함께 버무리며 눈길을 끌었다.
이탈리안과 프렌치 리비에라에서 휴가를 즐기던 1960년의 전설적인 여배우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자유롭고 느긋한 매력이 주는 은근하고 묵직한 자극을 끌어냈다. ‘눈 앞’이란 무대의 해석은 조금 조정했지만 이미 가지고 있던 패브릭을 사용하는 동시에 지중해 어느 도시를 여유롭게 산책하는 그 와중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작동한다.
바람이 길을 내는 섬과 유칼립투스의 향, 핑크빛 부겐빌레아가 원래 하나인 것처럼 움직이며 팬데믹의 충격을 완화한다. 좋게 말하면 그렇다. 솔직히 말한다면, 지갑을 열게 했다.
‘핑크빛’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부겐베리아라고도 부르는 이 꽃은 열대 지역 출신이다. 순수함과 열정이 넘치는, 아니면 정열적이지만 끝이 아픈 사랑 이야기 하나쯤은 품고 있을 거란 예상은 어김없이 부서진다. ‘포인세티아’처럼 뭔가 그럴싸한 발음을 내지만, 그냥 사람 이름이다.
부겐빌레아라는 이름은 18세기말 프랑스 해군 제독이었던 Louis Antoine de Bougainville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당시 탐험에 동행했던 식물학자 Philibert Commerçon가 이 꽃을 발견하고 제독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얘기도 있고, 꽃을 최초로 발견한 프랑스의 탐험가 '부겐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느 선원이 찾아 전했다 등등의 사연이 전해진다. 어느 것이든 시원하지는 않은, 김빠진 맥주 같은 느낌이다.
다만 이 꽃의 매력은 꽃처럼 보이는 선홍·핑크빛 부분이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라는 데 있다. 사연 하나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진짜 꽃은 꽃술처럼 보이는, 가운데 부분의 하얗고 작은 흰 꽃이다. 학술적으로 꽃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이런 종류의 나뭇잎을 포엽(苞葉)이라고 부른다. 나뭇잎인지 꽃잎인지 알 수 없는 중간의 상태, 이것이 부겐빌리아의 독특한 매력이다. 꽃으로 착각하기 쉬운 포엽은 3개씩 싸여서 삼각형 모양을 이룬다. 분홍자줏빛ㆍ빨강ㆍ오렌지색 등 다양하고 광선이 강할수록 포엽의 색이 진해진다.
분꽃과의 덩쿨성 식물로 6~8월 사이에 꽃이 핀다. 온도만 잘 맞으면 연중 꽃을 피운다. 전 세계에 약 300종의 부겐빌레아가 있다고 한다.
발음도 낯선 부겐빌레아 얘기를 왜 꺼냈을까. 때마침 강한 인상을 준 둘 때문이다. 하나는 탄탄한 작품성으로 감성을 건드리는 애니메이션, 다른 하나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꽃 주제 축제다.
-바이올렛과 부겐빌레아
아카츠키 카나 원작의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어릴 때부터 전쟁의 도구로 이용되어 사람의 감정을 배우지 못한 소녀가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던 상관이 마지막에 남긴 “사랑한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과정을 편지 대필을 통해 그려간다. 전쟁이 끝나고 타인이 마음을 전달하는 편지 대필가인 자동수기 인형(돌)으로 일하게 되며 만나는 다양한 의뢰인들과 그들의 사연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완성형이다. 원작 인지도는 낮았지만 섬세하고 완성도 높은 작화와 단단한 스토리가 단번에 팬덤을 만들었을 정도다.
멜로 장르 특유의 느린 호흡이 지루하지 않고 자극적인 최루성 포인트는 없지만 어느 순간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작품이라고 할까.
숨겨진 장치 하나가 바로 꽃이다. 바이올렛은 ‘나를 사랑해주오. 순진한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제비꽃이다. 바이올렛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가르쳐주는 길베르트 소령의 성은 다름아닌 부겐빌레아다. 부겐빌레아의 꽃말은 ‘정열’과 ‘조화’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게 하려면 침착함과 상실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편지를, 쓰지 않으시겠습니까? 편지라면 닿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말할 수 없던 마음의 너머까지도”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천양희 ‘너에게 쓴다’>
-제주 한림공원의 한 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림공원을 일부러 찾았다. 몇 번인가 확인도 했다. “폈어요?” 6월 중순 축제는 끝났지만 사실 지금도 한창인 부겐빌레아를 만나기 위해서다.
열대분재원에서 30년 이상 자란 부겐빌리아가 C사 수석 디자이너의 간택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몸을 비튼다. 화려한 꽃 옆에서는 주눅이 들만도 한데 나이나 성별 관계없이 꽃을 보고 웃는다.
‘내 생에 꽃은 장미 뿐’이라고 선을 긋는 70대 초반 친정엄마의 입에서 “곱다”를 연발하게 한 장본인의 숨은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꽃처럼 보이는 꽃싸개의 촉감이 마치 종이와 같아 ‘Paper Flower’라고도 불리는 이유를 손으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않는가. 말을 그렇게 해놓고 정작 혼자 찾아간 탓에 열심히 꽃만 찍었다. 아니 꽃싸개와 사랑에 빠졌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도 그랬던 것 같다. 색에 눈이 멀어 진짜 꽃은 놓쳤다.
흔들렸다. 덕분에 올해 반이 지난 지금, 챙겨야 할 것이 있음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