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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Oct 13. 2022

내고 걷고 밀어낸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

제주 ‘길’에서 묻다 PART Ⅰ. 길 나섬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강물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빚을 여는 아픔이 된다 


 - 문정희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이다. 

오래 전 끄적였던 글을 꺼낸 이유는 단순하다. 언제부턴가 '15분 도시'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이면서 슬쩍 궁금해졌다. 15분 도시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의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가 주창한 개념이다. 교육, 의료, 공원, 문화시설 등 일-주거-문화-여가 등 모든 일상이 15분 이내 가능하도록 구축된 도시를 의미한다. 뒤집어 설명하면 도시를 소규모 생활권 단위로 나눠 15분 내로 일상에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15분 도시가 주목받은 배경에는 지난 2년여 삶의 반경을 축소시켰던 코로나19가 있다. 우스운 얘기기는 하지만 배달 서비스 요금 적용 여부에 따라 근접 생활권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최소한의 반경에서 가능한 접촉을 줄이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단거리 이동에 적합한 교통수단이 활성화된 것 역시 15분 도시의 개념을 솔깃하게 했다.

온난화 심화 등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부상한 '녹색도시(도시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도시를 구현하기 위해 1992년에 도시개발 분야에서 고안된 개념)'역시 힘을 보탰다. 다만 '좋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해도 될까, 싶은 마음이다.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아큐정전(阿Q正傳)」등을 쓴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 루쉰의 소설 '고향'의 맨 마지막 구절을 꺼낸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제주에 많은 길이 만들어지고, 또 허물어지고 있다. 어떤 길은 단 5분을 줄이기 위해 직선이 되고, 어떤 길은 느릿느릿 세상과 만나기 위해 '발'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단순히 '길'일 뿐이다.  그 위에 '15분'이란 개념은 숫자일지, 안정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일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은 '길'을 알아야 하는 일이다.

막무가내 밀어넣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솔직히 고집이 세다. 그래서 '길'하고 내지르고 본다.

사실 그 안에 응축된 것은 고스란히 제주가 된다. 오랜 시간 속 시원히 털어내지 못했을 뿐 사람이 내고, 걷고, 또 밀어낸 '길'이다. 그런 길에서 '제주'를 묻는다.     

제주에서는 길을 따라 시간도 흐른다. 그렇다고 덧없이 놓아버리기에 그 길이 견뎌온 시간과 묵묵히 품어온 풍경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섬 안을 더듬고 모자라면 바다고 건널 요량이다. 제주를 말해줄 때까지.


     

# 제주 문화 유전자를 찾아서     

제주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일주도로. 환상(環狀)의 도로에는 제주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함께 묻어 있다. 일주도로를 중심으로 시장 점포가 들어섰고, 삶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졌다. 타 지역으로 가는 교통수단이 선박뿐이던 시절, 바닷길은 세계로 향한 물물교류의 창이었다. 전근대 시대 제주 포구는 뭍사람들을 맞고 보내는 관문이자 생활물자를 주고받는 교역의 중심이었다. 삼양·곽지·용담동 등에서 고고학 유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길은 사람이 만든다. 그래서 길에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의 자취가 남겨져 있다. 남겨진 자취는 그 지역에 뚜렷한 상징으로 자리 잡아 후세에 문화유전자로 새겨진다.     

한번 더듬어보자.     

옛 지도에 그려진 제주의 옛길은 모두 발로 더듬은 길이었다. 처음 걷기 편하던 길을 따라 꾸불꾸불한 도로가 났다. 다시 그것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진행된다. 이유는 하나 '시간 단축' 때문이다. 이제는 한적한 시골길까지도 많은 공사비를 투입해 손을 댄다. 직선이 빠르기는 하나 곡선은 아름답다.     

중산간 잣성을 따라 걷는 길은 제주목축사와 맥이 닿는다. 제주 바닷길의 지킴이인 도댓불은 화려한 경관의 해안도로와는 또 다른 길을 일러준다.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유배길에서 시간은 느리게만 흐른다. 기계장치를 동원한 것도 아닌데 멈춘 듯 느려진 시간은 멀리 변방까지 내려와 돌아갈 기약 없이 정처 없는 마음을 담아서다.     

슬쩍 고개를 돌리면 이내 바닷길이다. 제주에서 바닷길은 뭍 위의 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품고 있다.     

제주에서는 나지 않는 광물로 만들어진 고고 유물 등은 과거 제주의 교역로와 연결된다.     

#'옛'길에서 호흡하다     

여러 표류 기록들에서 파도에 밀려 오키나와까지 떠내려갔던 제주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던 바닷길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한반도 땅 어디에서건 만나지는 제주 잠녀의 흔적은 멀리 이국 블라디보스톡까지 가 닿는다. 일본의 아마는 제주 잠녀를 자신들의 원조라 말할 정도다.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들도 바다를 건넜다. 대전 골령골과 목포 옛 형무소, 멀리 대마도까지 슬픔의 기억이 차고 넘친다. 

   

길은 발자국으로 숨을 쉰다. 밟아주지 않으면 길의 문화와 역사가 죽고 만다. 새 길을 내는 것보다 옛길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대부분 길을 걷는데 치우칠 뿐 길이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는 놓치기 쉽다. 제주의 길은 시간이 만들었다. 그 길에서 제주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길에 녹아 있는 시간을 밟고 확인하고 기록을 통해 문화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 이번 '길'의 목적이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는 머리에 있지만 기록을 담당하는 뇌는 손 끝에 있다.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은 중요한 것일수록 몸이라는 방부제를 써야한다.     

사실 아무리 멀고 긴 길도 걷다보면 다다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높은 이상을 품고 있으며 누구나 한때 꿈을 좇아 힘든 여행을 떠나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길이 울퉁불퉁하다는 이유로 결국 포기하고 만다. 바꿔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하고, 더 천천히, 더 즐기면서 갈 수 있다. 요철 때문에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까닭에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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