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에서 ‘ESG’를 보다
제주에 산다고 제주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면이 바다인 섬에 천혜의 자연과 문화적 전통이 옛 모습에 가깝게 남아있는 보물섬 정도로 충분할 것도 같다. 아니면 누구보다 부지런히 제주를 누비며 포토 스팟은 죄다 섭렵했고 어지간한 소개글 정도는 익숙하게 쓸 수 있을 정도도 나쁘지 않다. 다만 그럴까, 싶다.
제주하면 떠오르는 것의 답 중 한 손 순위 안에 드는 해녀는 어떨까. 제주해녀를 만나 그들의 삶 안에 들어가 살핀 지 올해로 17년째가 됐다. 최근 몇 년은 운좋게(?) 해녀 관련 교육 등에 강사로 섭외되기도 한다. 익숙한 듯 ‘제주해녀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보자’로 시작해 예상대로 2~3분 남짓한 침묵과 마주한다. 대상이 제주 밖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부터 평생교육 과정의 어르신까지, 한결같다.
처음에는 ‘아니 왜?’하는 생각에 혼자 당황했지만, 지금은 아주 유연하게 편하게 떠오르는 것을 말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제주 해녀다. 제주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한다. 바다와 직접 채취한 신선한 해산물, 검정색 고무옷, 숨비소리라는 단어까지 기억한다면 일단 합격점이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할머니’를, 반대의 경우는 좀 순화한 ‘아주망(아주머니)’이나 어머니, 누님이 등장한다. 그 고비만 넘고 나면 ‘쉽게 보기 힘든’ ‘고생한’ ‘억척같은’ 수식어가 수줍게 손을 든다.
제주 바다에 둥둥 오렌지색 꽃이 핀 자리 ‘휘이이 휘익’하는 소리를 내며 물 속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나이 든 여성들의 이미지까지는 그나마 아름답다. ‘목소리만 크고 욕심 많은’으로 진행하면 사실 걷잡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인어공주를, 외국 언론들에는 워킹우먼, 아마조네스로 그들의 삶을 유추한다. 결국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슬픈 함정에 발이 걸려 있는 것을 모른 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색 바다와 파란 하늘 사이에서 마음껏 바닷속을 누비는 그네들의 겉모습과 기록이란 이름으로 남은 과거만 본 결과다. 그 정도로 낭만적인데도 고령화와 그로 인한 소멸 위기를 반복해 얘기한다. 이 심각한 사회문제를 왜 해결하지 않고 방치 하는가. 그 다음은 독특하면서도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는 조직 문화를 얘기한다. 우리나라 국가중요어업유산 1호(2015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2016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유산·2017년)에 현재 세계중요농어업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사정과는 어딘지 맞지 않는 것 아닌가 말이다.
제주에는 해녀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는 해녀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9월 23일 제15회 제주해녀축제 사전행사로 열린 제주해녀학술대회에서도 해녀문화를 한반도 전체 어업문화유산으로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다만 제주해녀는 특별하다. 해녀회(잠수회)를 중심으로 원시 채집문화의 특징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여성 중심의 해양문화공동체는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다시 궁금한게 생긴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장비를 이용하지 않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어업’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일단 제주해녀박물관의 해녀 소개글을 보자.
기계 장치 없이 맨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으로 이들이 하는 일을 ‘물질’이라 부른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꾸어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획득한 지혜를 세대에 걸쳐 전승해왔다. 또한 해녀들은 바다 생태환경에 적응하여 물질 기술과 해양 지식을 축적하였고, 수산물의 채취를 통하여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한 여성생태주의자(Eco-Feminist)들이라 할 수 있다. 반농반어의 전통생업과 강력한 여성공동체를 형성하여 남성과 더불어 사회경제와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양성평등’의 한 모범이기도 하다. 또한 제주 해녀는 19세기 말부터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외로 진출하여 제주경제영역을 확대한 개척자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주해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공존, 지혜 전승과 축적, 생태주의자, 개척자라는 단어가 해녀와 연결된다는 건 쉽게 연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여기에 등장한 단어들은 어딘지 낯익다. 정치 영역을 빼고 툭하면 등장하는 ’ESG’의 흐름과 닮은 무엇이다.
‘ESG’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부상한 말로, ‘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의 약자다. 최근에는 지속가능경영이라고도 해석한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거냐”는 볼멘소리에 국립국어원이 ‘ESG경영’을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환경·사회·투명 경영’을 선정했다. 환경 보호와 사회적 기여도를 고려하고 법과 윤리를 준수하며 지배 구조를 개선하고자 하는 경영 철학을 아우른다. 그래서 이해가 쉬워졌냐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이 해녀문화와 닮았다니, 과연 그럴까.
해녀박물관 자료에서는 포함하지 않았지만 유네스코가 제주해녀에 부여한 의미를 생각하면, 그리고 지금까지 제주해녀문화가 유지됐던 배경을 안다면 생각은 이내 달라진다.
제주해녀문화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유산(Human Heritage), 그리고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이다.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도, 사라질 수도 있는 지극히 민감하고 연약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언제부터’는 물론이고 ‘언제까지’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을 품고 있다. 심지어 해녀가 아니라 해녀문화, 해녀 공동체가 지닌 힘이다. ‘지속 가능한’이란 말에는 경제나 정치적 힘이 아닌 생존력이 깔려있음을 제주해녀문화는 현재형으로 말해주고 있다.
#1 다닥닥 다닥닥.닥닥닥닥. 탁탁탁탁.
4~5월 즈음이다. 한창 봄꽃 구경이 한창인데 바닷가에 한 무리 사람들이 모여있다. 돌망치 두드리는 소리를 낸다. 뭔가 긁어내는 소리까지 요란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죄다 여성들이다. 1년 두 번 하는 갯닦이라고 했다. 옆에서 한 삼촌이 ‘깡깡이’라고 거든다. 옆에서 “돌 두드리기주게(돌두드리기지)”한다. 한바탕 웃는가 했는데 다시 닥닥닥닥 소리만 남는다. 갯닦이용으로 만들어진 골갱이가 움직일때마다 석회조류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쉬워 보여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손목 다쳐”.
봄의 일만은 아니다. 1년 상하반기로 나눠 2번 해녀들이 ‘돌 두드리기’에 나선다. 갯닦이를 부르는 다른 말이다. 모여 하는 일은 맞는데 성격이 조금 달라진 때문도 있다.
해녀들은 마을 어장 관리를 위해 1년 한 두차례 어장 청소를 한다. 공동 작업이다.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 등을 치우기도 하고 잡초인 ‘바당풀’도 제거한다. 최근 들어서는 물이 빠지고 바닥을 드러내는 조간대, 그것도 오래 물에 잠겼던 경계 부분에서 묵은 때를 벗기듯 석회조류 따위를 걷어낸다. 각종 해산물이 잘 자라기 위해 먹이가 풍부한 환경을 제공하는 작업이다. 아무 때나 하는 것도 아니다. 한물기(보통 15일)중 일반적으로 물빠짐이 좋은 7물에서 9물에 맞춰 5~6일 정도 작업을 한다.
해녀 학교나 어촌계에서 견습해녀로 일하는 동안 자주 듣는 말도 이 갯닦이의 중요성이다. 바당풀을 제거하는 것에서 석회조류를 떼어내는 일로 바뀐 가장 큰 원인으로는 갯녹음 현상이 꼽힌다. 환경 오염과 수온 상승으로 바다가 허옇게 빈 가슴을 드러내면서 해녀들은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바다환경캠페인 홍보 영상에서 한 젊은 해녀가 말한다. “예전에는 해녀 삼촌들이 나이가 들어서, 더 작업하기 힘들어서 은퇴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바다가 더 내줄 것이 없어서 그만하고 가라고 할 것 같다”고.
그런 상황을 아예 막을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천천히 마주하기 위해 해녀들이 돌을 두드린다.
해녀어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무형문화유산의 범주 안에 '환경적 지속가능성'이 포함돼 있다.
환경적 지속가능성은 안정된 기후, 지속가능한 자원관리 및 생물다양성의 보존을 필요로 한다.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에 대응해 공동체 회복력을 강화하는 것이 인적,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줄이는 데 필수 요인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하는 부분이다.
해녀가 그러했듯 무형문화유산는 세대를 통해 축적되고 변화해 온 전통지식, 가치 및 관습들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들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상호교류를 하는 데서 시작됐다.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무형문화유산의 기여는 생물 다양성 보존과 지속가능한 자원관리, 자연재해 대비 및 대응 등의 많은 분야에서 인식되고 또 접목되고 있다.
제주 해녀는 공동체의 배경인 바다 및 자원 관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같은 자리에 다양한 종의 성장 가능성을 살피고, 예측할 수 없는 기후나 환경변화에 대비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해양 황폐화와 자원 고갈 등의 이슈 속에서 제주 해녀의 '키우는 어업(종패사업)'과 바다 환경 정비(갯닦이 등) 노력은 남다른 관심을 받는다.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작업을 진행하던 당시 공동 등재 이상을 기대하던 일본이 이 갯닦이 작업을 아마(海女·あま)를 중심으로 한 해안 관리 사업에 적용했던 일도 있다.
불가사리 퇴치 작업에 손을 빌려주던 해녀들이 망사리 가득 바닷속 쓰레기를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바다환경 오염도 문제지만 자칫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결과다.
#2. 2013년 인간극장 ‘엄마의 바다’편. 제주 동쪽 바다를 누비는 모녀 해녀의 사연이 소개된다. 결혼으로 부산으로 떠났다가 생계를 위해 다시 제주로 돌아온 강경옥씨와 어머니 김기순씨다. 강씨의 당시 나이는 35살. 흔치 않은 30대 해녀다. 어머니 김씨는 청각장애와 언어장애에도 홀로 두 딸을 키워냈다. 뭍에서는 대화도 쉽지 않고 딸이 해결하는 일이 더 많지만 바다에서는 다르다. 상군해녀인 어머니는 바다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솜씨를 뽐낸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고단한 인생의 무대에서 스승이자 선배, 동료가 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제주에 내려와 몇 년 잠수회 일을 보며 숟가락 사정까지 다 아는 삼촌들이었지만 정작 해녀로 잠수회에 가입하는 일만큼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상군이어도 전체 의견을 바꿀 수는 없었다.
처음은 숨 참는 것도 힘들고 물건도 찾지 못하던 ‘똥군’이었지만 한해 두해 삼촌들을 따라다니며 실력을 쌓고 잠수회 대표 선수로 물질대회에도 나갈 정도가 됐다.
비슷한 얘기를 대상군 역할을 하다 은퇴한 해녀에게서도 들었다. 성산어촌계 고송환 전 해녀(77)는 ‘제주 첫 경선 어촌계장’으로 12년이나 역할을 수행했다.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지만 바다에 대한 것으로는 그의 지혜와 경험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학벌이나 외모, 권력 따위가 없어도 열심히 일한 만큼 벌 수 있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등재 작업 때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런 고 해녀도 처음부터 물질을 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물에 들어가면 소라는커녕 풀과 돌, 모래 같은 것밖에 안 보인다. 제 아무리 많이 벌고 싶어도 물이 들고 빠지는 것을 맞추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다"며 "물질은 단순히 가르쳐 아는 일이 아니야. 각각의 능력치에 맞춰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지. 그냥 해보는 것이 아니라 몇 년이고 시간을 들여 익히는 일"이라고 귀띔했다.
장애가 있어서 안 된다거나 신분이나 출신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4‧3당시 부모를 잃은 어린 여자아이가 친구를 따라 바닷가 마을에 놀러 왔다가 자맥질하는 솜씨를 눈여겨본 지역 해녀의 양녀가 돼 제 몫 다하는 상군 해녀가 됐다는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1950년대 즈음에는 가파도에서는 당시 가파국민학교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왔던 교장 부인이 마을 해녀들을 따라 물질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제주 이주 후 물질을 배우고 해녀회장까지 된 사례도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물도 무섭고 삼촌들도 부담스러워 말을 걸 때마다 도망다니기 바뻤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한마디에 삼촌들이 꼼짝 못한다. 잠수회 가입을 위해 수습 과정을 밟고 있는 결혼 이주 여성도 있다.
서귀포시 김형준 신례리 어촌계장은 해남이다. 제주 이주 후 우여곡절 끝에 8년 전 잠수회 총회에서 '같이 물질을 할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1월 자신이 해남이 된지 꼬박 7년 만에 인턴 해남을 받았다. 40대 인턴 해남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육군에서만 15년 복무한 전직 프리다이빙 강사다.
‘해녀’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다. 더 신경 써 살펴야 하는 것은, 물질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작업이란 점이다. 그 흔한 안전장비 하나 없이 바다에 뛰어든다. 바다에서는 함께 작업하는 '동료'가 유일무이한 보험이다.
모든 일에는 동료에 대한 신뢰가 우선 순위였다. 대상군부터 상군·중군·하군까지 구분을 뒀다고 하지만 이는 능력에 대한 인정이었을 뿐 상하 구분과는 거리가 있다. 공동어장 작업 등 오히려 수평적 삶의 가치를 나눴다.
그렇게 꽁꽁 자신들의 영역만 지켰다면 ‘공동체’라고 부르기 어렵다.
잠수회로 뭉쳐 '사회 활동'은 하지만 법률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어촌계 하부 조직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마을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해녀들이 먼저 움직였다.
어촌계에 편입되기 이전에는 마을의 공공적인 일에 있어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 구성원 중 해녀 비중이 큰 큰 마을들을 살피다보면 학교 운동장 구석이나 마을 한복판에 그 곳 잠수회(해녀회)에서 성금을 내고 학교 부지를 마련했다거나 마을 공공시설을 짓거나 길을 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도의 「제주의 해녀」(1996년)에서도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에도 해녀회의 공금은 큰 몫을 맡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을지 외에도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2011) 같은 기록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온평리 해녀 공덕비’다. 제주해녀박물관에서도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공덕비에는 해녀들이 학교바당에서 채취한 미역을 팔아 학교 신축공사와 재건, 전기가설과 같은 일들 했다는 사회봉사와 헌신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지역 출신 재일교포나 재력가의 도움으로도 학교 부지밖에 구할 수 없었지만 해녀들이 미역판매 대금을 기부하면서 학교를 짓는다. 화재로 목조 건물이 전부 소실된 상황에서도 다시 미역판매 대금을 무사히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했다.
사수도 '육성회 바다'도 있다. 추자도의 부속섬인 사수도는 추자도 교육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추자초등학교의 전신인 최성학교 때부터 학부모들이 섬을 사서 관리했다고 한다. 사수도 물질로 번 자금의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내놓는 형태로 학교를 관리했다.
우도에도 '기성회바당'이란 것이 있었다. 우도의 경우 해안 공동어장의 일정 지역을 공동 관리해 학교운영 자금을 마련했다. 학교운영회 자금 모금이 금지된 이후에는 마을공동사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쓰임을 바꿨다.
'마을에서 전기를 들여온다든지, 수도를 시설한다든지 하는 공동어장 개발사업을 벌이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해녀 공동어장의 어업권을 팔았다'는 내용을 신문 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0년에는 '어촌협업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해녀들의 협동재배 기사가 유독 많이 등장했다. 어촌계 잠녀들 또는 잠수회를 중심으로 1인당 얼마씩 돈을 모아 밭을 임대, 고구마나 무, 유채 등을 심어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비식용 해조류'를 채취해 수익을 올렸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공동수익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랬던 노력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3. “이 밖으로는 가지고 나가지 마라”
섬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바다에서 사고가 나거나 바깥물질 다녀오는 사이 마을 안에는 다양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처첩문화가 꽤 오래 남아있던 제주에서 서로 목숨을 의지해야 하는 해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당장 너 죽고 나 죽자 싸워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 불턱 안에서 정리되곤 했다. 불턱 안에서는 남편이나 시댁 흉을 보고, 싸워도 되지만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마라'는 불문율이 있었고 또 지켜졌다.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대상군과 민회 성격의 자조모임인 잠수회, 그리고 불턱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생업에서 파생한'이란 특수성은 종종 해녀를 공동체가 아닌 개별적 경제 활동으로 바라보게 한다. 바다에서 자급자족해 가족을 건사하던 해녀들이 일제 강점기 일본 무역상의 등장으로 현금 수입원이란 힘을 가지게 됐고, 제주 경제에 자금 흐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아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많은 경우 돈이 움직이고, 수익의 많고 적음에 차이가 커지기 시작하면 공동체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해녀가 어떻게 현재까지 유지되고 다음을 바라보게 됐을까.
제주 출신인 김은실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4대 아시아여성학회장)는 2019년 12월 6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여성학회 학술대회에서 일방적·시혜적 배움이 아닌 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호혜적 배움'이 가능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짚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을 제주해녀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도 '공동체'라 부르는 해녀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원리에 주목하고 이를 공통재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지속가능한 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근원을 도시화로 삭막해진 인간성 회복과 더 나아가 지역 재생으로 활용하라는 의견은 공감을 샀다.
김순이 제주문학원장(시인)은 ‘대상군’을 짚었다. 김 원장은 "대상군의 역할은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범이었다"며 "물질 기술보다는 뛰어난 포용력과 리더십 등 '덕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말했다.
현대 사회의 조직이라 부르는 것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의사결정과정도 그렇다.
기후 변화와 코로나19 상황으로 기존 환경 자원에 의존했던 경쟁적 자본주의가 무너지면서 자립과 생존에 대한 고민이 커진 상황을 감안하면 수직적인 듯 보이지만 수평적인 해녀 공동체가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조직이 수평이냐 수직이냐의 판단 기준은 의사결정 구조, 즉 '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 상층부의 리더가 높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조직을 수직적 조직, 구성원들이 업무 현장에서 필요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조직 차원의 전략적 결정 역시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하는 조직을 수평적 조직이라고 본다.
수평적 조직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여전히 상층부에 집중된 의사결정 구조 때문이다.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공간, 조건 아래 작업을 하면서 해녀들이 만들어낸 것은 수직도, 수평도 아닌 그들 나름의 조직 문화다.
불턱에서는 소위 공정한 소득배분의 원칙에 입각한 공동체의 규정 아래 대등하게 목소리를 냈다. 다만 위계질서는 분명했다.
단합과 헌신이 절실한 해녀 공동체에 '대상군'이라는 리더는 솔선수범을 통해 완성된다. 모두의 합의에 의해 민주적으로 추대됐다. 잠수굿 등 큰일을 치를 때 상군이 앞서서 작업을 하고 일정 물량을 내놓는 등 역할을 맡는다. 갯닦기 등 공동작업에 있어서도 상군이라 예외를 두지 않는다.
마을일 개인일 할 것 없이 모여 의논하고 서로 지킬 것을 합의한다. 상하 구분 없이 자유로운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신뢰를 쌓는 역할이 늘 먼저였다. 예를 들어 불턱을 덥히는 일은 순서가 아니라 먼저 일을 끝낸 해녀가 한다. 작업 후 허기를 달래기 위해 죽이나 누룽지, 국수 같은 가벼운 음식을 챙기는 일도 따로 순번을 정하기 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형식이다.
조금 더 깊은 물에서 작업을 해도 되겠다는 판단도 불턱에서 받는다. 은퇴 시기도 마찬가지다. 대상군일지라도 체력과 판단력이 약해졌다고 느껴지면 주저없이 역할을 내려놓는다. 그 것이 전체 조직의 안전과 성과를 지키는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진다. 뒤로 물러난다고 해서 조직 기여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작업 등에 '삼촌'을 부르는 것으로 지식을 전승한다. '할망바다'도 있다. 일종의 선임자에 대한 배려다. 요즘 조직들에서 많이 요구되는 선순환 구조 중 하나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툰 해녀의 망사리에 슬쩍 소라 따위를 보태 주고 다음에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과 격려를 하는 게석 문화도 있었다. 경영학 등에서 멘토링(조직 내에서 상급자(Mentor)와 하급자(Protege 또는 Protegee)간의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관계발전을 조정하거나 유지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기업 내 커뮤니케이션의 상당 부분이 공유절차가 생략된 채 결과에만 집중되거나 단순히 결론만 전달 받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달리 해녀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은 공유·공감에 우선순위를 둔다.
제주의 각 어촌계는 어장의 경계, 해산물의 채취자격, 해산물 종류에 따른 채취방법과 채취기간 및 금채기간 등 제주해녀의 물질관행을 마을, 어촌계, 잠수회 단위의 규약으로 정해놓고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다.
소라는 체장 7㎝ 이하는 잡지 않는다. 오분자기는 체장 3.5㎝ 이하, 전복은 10㎝이하는 잡는 대신 좀 더 바다에서 키우는 걸 선택한다.
UN환경협약 이후 탄소가스 배출권을 돈을 주고 사게 된데는 자연에 지속가능한 여건을 마련해 줄 때 자원이 남고 기업도 영속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 해녀 공동체가, 민회 형태의 잠수회가 만든 자체 규약은 이미 '자원 재생이 가능하도록 배려하는 규칙'을 준수하고 있음은 그 의미가 크다.
지킬 것만 늘어놓는다면 조직이 경직될 수밖에 없지만 해녀 공동체에는 다른 역할이 있다. 지지다.
힘든 바다 작업에 어이를 잃거나 또 출산 후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채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고단함도, 바다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동료를 잃은 상실감도, 실력이 뒤지거나 그날 머정(운)이 좋지 않아 망사리가 비어도 "그럴 수도 있다. 다음엔 더 나아질 것"이란 지지와 공감을 받고 이겨낼 수 있음을 확인받는다.
가슴에 손을 얹고 ‘좋은 것만’봤음을 시인한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나잠어업’은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 경제적 손익을 놓고 보면 서둘러 접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처음 얘기했던 생존력, ESG와의 연결고리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을 보면 인류 진화는 ‘모닥불 주변에 둘러 앉는 행위’에서 시작됐다. 생존을 위한 사회성이 필요해지면서 동료들과의 신뢰 관계 형성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덕적 능력인 공감, 공평, 정의 같은 것들이 형성됐다. 농경사회 전 수렵·채집사회 단계의 일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주장을 보면 사피엔스의 주된 활동은 채집이었다. 평범한 수렵채집인은 현대인의 후손 대부분에 비해 주변 환경에 대해 좀 더 넓고 깊고 다양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 공동체의 지식은 고대 인간 무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개인 수준에서 보자면 고대 수렵채집인은 역사상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농경·산업사회와 달리 척박한 곳에 살아가면서 평균 노동시간은 짧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계절마다 크게 달랐고, 폭력이나 사고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안락하고 보람 있는 생활을 영위했다. 한가지 식량에 의존하지 않았고,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은 '최초의 풍요사회’로 정리한다.
채집수렵사회의 형태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사례가 제주해녀문화다. 충분히 흥미롭지 않은가.
* 이 글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J커넥티드 2022년 가을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