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 물어봐
시골에서 올라온 용이와 광화문 근처에 있었다(다행히 광화문 집회가 있기 이틀 전이었다). 교보빌딩 앞에서 잠시 서있는데 용이가 건물 입구의 표지석 글자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바위 세 개에 나뉘어 새겨진 글자들은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익숙해져 표어처럼 굳어진 문장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용이가 물었고 나는 빈정거렸다.
“참 좋은 말이다. 나도 책을 꾸준히 읽었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됐을까?”
“책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된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더 사악해지는 경우를 한두 번 봤냐?”
어렸을 때부터 순하기만 했던 용이는 역시 긍정의 화신이었다.
“그래도 책은 좋은 사람을 만드는 좋은 도구가 확실해. 어느 세상이든 잡초는 늘 있으니까. 난 영 책과 인연이 없어. 잡초 뽑는데 죙일 매달리고도 모자라.”
말없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용이가 불쑥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사람은 작물을 키우고 작물은 사람을 키운다. 이래도 말이 되겠다. 그치?”
헛, 그야말로 명언이다. 책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확률보다 작물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확률이 훨씬 높지 않을까. 적어도 용이를 보면 그렇다. 용이는 작물을 키우는 게 아니라 운명을 같이 한다. 식물의 생성과 소멸과 환생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공부하는, 수도자 같다. 이 친구를 만날 때마다 농부는 수도자라는 느낌이 든다. 한권의 책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우주섭리를 읽어내고 체화하는 친구, 머리로 책을 읽는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게가 실려 있다.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가 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두 친구가 서로 상대방 동네를 방문하며 겪은 체험 여행기이다.
먼저 도시 쥐가 시골 쥐네로 놀러간다. 산과 밭에서 먹거리를 해결하고 밤하늘의 낭만에 빠지기도 하면서 시골 삶을 맛본다. 며칠 안 간다. 도시 쥐는 시골의 답답함을 느낀다. 시골은 ‘노잼 노답’이라며 시골 쥐를 데리고 도시로 떠난다.
시골 쥐는 도시의 화려함에 놀라고 맛있고 풍성한 먹거리들에 반한다. 동시에 도시의 위험들과 각박함을 경험한다. 시골 쥐도 도시 생활에 며칠 못 견디고 살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도시 쥐가 시골로 먼저 내려갔는지 시골 쥐가 도시로 먼저 올라왔는지는 헷갈리지만 하여간 그런 얘기다.
저마다 먹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서있는 자리들이 다르다는 암시가 담긴 우화였나 본데, 내 기억 속에는 흐릿한 줄거리만 남아 있다. 내용은 흐릿한데 쥐들의 표정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골 쥐의 초롱초롱한 눈, 윤기 없는 털, 소박으로 가장한 가난한 이미지들. 도시 쥐는 당연히 반대로 기억된다. 반짝이는 눈에는 눈치 빠르고 영악한 느낌이, 윤기 있는 털과 폼 나는 옷가지들에는 부를 위장한 허세가 담겨 있었다.
물론 이 기억은 뒤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 작가의 의도에 휘말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쥐의 공통점이 있었다. 쥐라는 것 외의 유일한 공통점은 눈이었다. 두려움, 슬픔, 견딤 같은 느낌들이 두 쥐의 눈에 똑같이 담겨 있었다.
답답하고 두렵고 아련한 2020년 한복판, 우리는 쥐와 다를 바 없다. 나이 한 살을 물어내라고 외치고 싶지만 어디에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불안한 시절, 내일을 알 수 없다고 용이에게 푸념했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럴 때는 나무에게 물어 봐.”
용이는 정말로 그렇게 한다고 한다. 나무는 금세 답을 주지 않지만 걱정을 놓게 해준다고 한다. 그러다 질문을 잊어버릴 즈음, 슬쩍 깨달음을 준다고 한다. 식물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은 얼마나 정확한 팩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