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과 빛의 언저리에서
지하철 4호선 라인에 인덕원이란 역이 있다. 정부종합청사가 있던 과천과 안양 평촌의 중간지대에 있는데 어쩌면 모든 것의 중간 지점이기도 하고 사람살이의 중간지대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곳이(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이다).
인덕원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고층 아파트부터 소형주택까지, 큰 외식당부터 작은 선술집까지, 술과 음악이뒤섞인 환락가부터 깊고 조용한 전원주택지까지, 성스러운 교회와 절, 성당부터 범죄자들을 모아놓은 구치소까지, 네온사인 만발한 도심 외곽으로는 관악산과 청계산 인근의 전원과 호수들도 이어진다. 한두 정거장 거리에 병원과 장례식장, 대공원과 동물원, 미술관들도 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모든 요소를 갖춘 곳, 인덕원.
인덕원에는 모든 것이 있다. 세밀하게 탐구하고 분석해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 우연히 눈에 띈 광고 포스터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빛을 받아드립니다.
연락처 010-0000-****
놀라운 광고였다. 빛을 받아주는 직업이라니. 과감한 카피는 또 있다.
이젠 빛에서 자유롭게 해방!
와우, 회생-파산이 나란히 힘있게 서있는 모습도 신기하다.
빛은 빚의 오타이겠지만 어쩌면 의도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구를 새삼 음미해보니 빛이야말로 빚이고, 빚이야말로 빛일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빚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이들이 수두룩하니 그럴 때 빚은 빛이 된다. 빛인 줄 알고 덥석 물었다가 빚의 늪에 빠지는 일도 다반사다.
인덕원이란 곳을 이렇게 깊이 있게 음미하게 만든 광고물은 빛나는 추억도 선물해 줬다. 오래 전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희귀하던 시절, 인덕원으로 이사한 동료가 있었다. 당시에는 집들이를 안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소문이 돌던 태곳적, 너도나도 집들이 잔치를 필수로 했다. 서울 하고도 강북의 끝 어디쯤에서 출발한 후배가 장소를 물어물어 늦게 도착했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인더건이 이런 곳인 줄 미처 몰랐어요. 너무 멋진 이름이라 캘리포니아 어디쯤인줄 알았다니까?”
모두 어리둥절했다. 멀다고 투정하는 줄 알았다가, 이름이 멋있다고 칭찬하는데 그 칭찬은 착각이고 어쩌고 횡설수설했다.
그러니까 뭐가 멋있다고? 갸웃갸웃하던 우리는 그 후배의 청력이 놀랍게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인덕원을 인더건(in the gun)으로 들은 것이었다. 그때 집주인이 베란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유명한 서울교도소야. 인 더 건도 맞지 뭐.”
그때부터 인덕원은 인생의 처음과 끝이 다 있는 곳이었나 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흘러 빛과 빚이 내게로 왔다. 회생과 파산의 언저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나라도 빚더미레 짓눌리고 있다. 무역수지 적자가 역대급이고, 개인들의 채무액도 역대급이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치를 경신하는 중이다. 출생률 저하가 역대급으로 진행되는 이 빚은 어찌 감당할까 걱정이 또 다른 빚을 낳는다. 이 빚을 빛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010-0000-****으로 전화를 할까.
이런 때라서 그런가. 전생을 다룬 영화와 판타지 드라마가 넘쳐난다. 우연이 아니다. 반전에 대한 갈구, 기적에 대한 갈망, 소비시장의 영원한 테마 아닌가. 빚과 빛도 원래 한몸이고 빚과 빛은 늘 반전하는 법이라고 믿으며 또 하루를 버티는 내뒷주머니 속에는 저 전화번호가 숨어 있다. 그 숫자들이 차라리 낫다고 속닥속닥, 엉덩이는 왜이리 근질거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