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하늘은 공허한데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지만 놀람이 반복되면 놀라지 않게 된다. 추석을 앞두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는데, 그간 놀람들에 지쳐서인지 탄성도 나오지 않고 어쩐지 놀랍지도 않았다. 이렇게 놀람과 탄성이 사라지면 인생 자체가 쇠약해지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됐다. 가끔씩 놀라기도 하고 탄성도 내지르고 싶다. 그래야 담도 커지고 신경도 활발해지지 않을까.
최근 일어난 놀라운 일들 중 식품유통업계에서 첫손에 꼽을 일은 신세계그룹 인사다. (예년과 다르게) 빠르고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주체는 이명희 회장이라고 한다. 재계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제외하면 그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꼭꼭 숨어 있던 사람인데, 이번에 업계를 깜짝 놀래켰다.
가계(家系) 중심으로 그녀를 설명하면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의 막내딸이다. 이병철의 아들 이건희 전회장의 여동생이고, 이병철의 며느리인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의 시누이가 된다. 최근까지 신세계그룹을 경영하며 각종 이슈를 만들어온 정용진 부회장의 엄마이고, 정용진의 첫 부인이었던 탤런트 고현정의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유통기업이나 경제적 현상과 별 상관이 없는 가계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한국 대기업의 특성(특이한 성질)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이명희 회장이 아버지(이병철 창업주)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했고 이병철 회장은 고미술 전문가로 딸의 예술적 감각을 성장시키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이 회장은 막내딸에게 기업 경영을 독려하며 신세계그룹과 조선호텔을 상속했다는 것이 정설(전설인지도 모른다)로 전해지고 있다.
이명희 회장은 기업경영을 남편에게 일임한 듯 밖으로 나서지 않았고, 경영 바통은 아들(정용진)로 이어졌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첫 번째 놀람은 여기에 있다.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그녀가 80대 나이에 전면 등장한 것이다. 돌아온 엄마는 아들이 아끼던 경영인들을 대거 내치며 ‘모든 것을 바꾸라’ 명했다.
두 번째 놀람은 이 ‘바꿈’에 대한 방향이다. 위기의 기업을 바꾸려면 본질적 리더의 책임부터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한국 기업의 숙명인가, 엄마는 아들만은 예외로 두었다. 물론, 놀랍지 않은 놀람이다.
놀람은 신체에 두 가지 현상을 낳는다. 탄성을 낳든가 탄식을 낳든가. 탄성을 낳는 놀람은 심신에 엔돌핀을 만들어주고, 탄식을 낳는 놀람은 심신에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놀랄 일이 없으면 인생이 평온할 듯 싶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것도 의학계 정설이다. 자극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를 못 느끼면 죽음이 가까워진다(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던진 화두이기도 하다).
놀람이 무뎌지는 가운데 가을이 왔다. 가을하늘을 보고 억지 탄성을 몇 차례 내질렀다. 삶의 의욕을 일으키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체질화돼 있나 보다. 해야 할 ‘무엇’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시점은 비슷하다. 위기를 느낄 때이고 승부수를 느끼는 타이밍이다. 바로 그때 놀람을 주도하는 자의 승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보다 훨씬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