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하고 거룩한 달
학창시절에 가장 싫어했던 달이 11월이다. 1년 12개월 중 유일하게 공휴일이 없는 달, 중요한 시험이 있는 달, 연말을 앞두고 뭔가를 허둥대며 쫓기던 기억이 11월에 숨어 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축제, 방학, 공휴일이 가득찬 12월과 비교하면 왠지 초라하고 버거운 달이었다. 그 앞의 10월은 공휴일이 가장 많은 달이었고, 대체로 추석 연휴까지 덤으로 얻기까지 했으니, 이래저래 11월은 애매하고 딱하게 낀 달이었다.
11월의 분주함은 요즘도 계속된다. 여전히 휴일이 없고, 행사는 많고, 실적과 계획의 마감 압박을 받는다. 어쩐지 11이라는 숫자까지 ‘1등만 대접받는 *같은 세상’을 떠올리게 하고, 편하지만 어렵기만 한 디지털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고, 가냘픈 젓가락도 연상시킨다.
달력에서 11월을 떼어내면 달랑 한 장이 남기 때문에 그 역시 쓸쓸함을 더한다. 남은 한 장을 지키기 위해 의무적으로 매달린 신세 같달까. 그 11월의 달력을 보다가 묘한 것을 발견했다. 11월의 기념일들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무슨무슨 날이란 것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는데, 하나는 거룩한 의무감을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쁜 우리 노는 날이란 특징이다. 11월의 기념일들은 하나같이 거룩하고 비장하다. 대표적인 날들을 순서대로 보자. (이 날들의 설명은 위키백과사전을 참고했다).
√ 11월 3일_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일제강점기인 1929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1953년 제정됐다.
√ 11월 4일_ 점자의 날.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 점자를 만든 것을 기념하는 날이란다. 1926년 11월 4일,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훈맹정음'이라는 한글 점자를 개발했다고 한다. 훈민정음 정신을 시각 장애인들에게 적용한 점자, 신기하면서도 거룩하다 아니할 수 없다.
√ 11월 9일_ 소방의 날. 119를 상징해 제정된 날이다(1991년 개정 소방법).
√ 11월 11일_ 농업인의 날. ‘11’이 두 번 겹쳐진 날이다. 땅 위에 곧게 선 두 줄기의 벼를 형상화한 것으로, 1996년에 제정됐다는데 농업의 역사를 생각하면 매우 늦은 감이 있다. 농업의 중요성이 점점 약화되는 시기에 농업의 날을 만들었다는 아이러니.
√ 11월 17일_ 순국선열의 날. 독립투사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지정한 날이라는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된 날이라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
√ 11월 22일_ 김치의 날.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가 11월에 수확되는 것과 김치의 재료들이 하나둘씩 모여 조화를 이루고 건강을 돕는다는 의미로 11, 22를 지정했다고 한다. 2020년의 일이니 무슨무슨 날의 막내 격이다.
싸우고, 구하고, 막아내고, 의지하며 함께하는 날들이 연속되는 11월이 가면 올해의 끝이 나타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달, 11월의 이미지는 세계적으로도 비슷한가 보다. 시적 언어를 잘 사용했던 인디언들은 11월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지난 달과 별 차이 없는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