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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오면

쌍둥이들의 운명이 궁금하다

by 포포

‘미지의 서울’이란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쌍둥이들의 ‘사주’가 생각났다.

일란성에 동성 쌍둥이라면 사주도 별자리도 같은데다 DNA도 유사할 테니, 운명도 비슷하지 않을까. 전혀 그럴 리 없다는 답이 예정돼 있고, 운명은 그런 것이 아니야, 라는 당연지론이 준비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옆집 살던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실제로 있었다. 두세 살 아래였고 제법 이쁘장하고 활달했던 쌍둥이 자매를 은근히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들과 언제 어떻게 헤어졌는지,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 비슷한 운명을 걷고 있는지, 종종 궁금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했다.


청년기에 한 번 쌍둥이 중 하나를 추석 때 본 적이 있는데, 언니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릴 때와 달리 왠지 어색하게 스치며 눈인사 정도로 스쳐 지나갔다. 둘다 그런지 하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품격 있게 컸다’는 인상을 그날 언니인지 동생인지가 주었던 것 같다.

또 보겠지 싶은 바람으로 추석 때 시골에 내려가면 그 집을 흘깃거렸던 몇 해가 있었다. 진즉 이사한 것도 모르고 말이다.


다시 또 추석이 온다. 같은 추석이지만 해마다 달라지는 추석 풍경을 보며 ‘사주’보다 ‘환경’의 힘이 훨씬 강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명절은 축제이면서 축제보다 훨씬 큰 공동체적 의례인데 왜 축제보다 덜 즐거울까 싶은 의문이 생긴다. 큰상을 차리고 절하고 기원하며 조상을 기리는 의례행위는 비슷하다. 하지만 제사는 숙연하고 고사는 즐겁다. 이웃 살던 쌍둥이의 운명을 추정하며 네 가지의 차이를 간단히 정리해 봤다.


√ 축제는 노래하고 춤추며 웃고 즐기며 삶의 활기를 확인하는 자리 같다. 공동체가 한데 모여 ‘우리는 즐겁게 산다’는 걸 확인하는 집단적 유희로 정의하면 될까.

√ 명절은 축제보다 규모가 크고 역사가 길고 멈출 수 없는 약속이라는 점에서 참여에 대한 의무감도 크다. 설과 추석, 춘절,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이 모두 파종과 수확을 기준으로 한 농경문화의 주기적 의례였던 점을 감안하면 도시화와 디지털화된 사회로 변한 지금까지 의무감에 짓눌려 있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 제사의 초점은 늘 과거로 향한다. 조상, 성묘, 추모, 가문, 혈연 등등의 상징어들이 모두 과거지향적이다.

√ 고사의 방식은 제사와 비슷하고, 전통적(과거형) 의례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초점이 미래로 향한다. 개업, 출항, 개막 같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잘 되기를’ 기원하는 순수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다. 이 시대와는 뭔가 언밸런스하기 때문인 듯, 점차 유머형 이벤트로 변신하는 모양새다.

네 가지 이벤트를 정리해 보면 흥미로운 연결구도가 나온다. 축제는 현재를 위한 것이고, 명절은 공유의 시간을 마련한다. 제사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고사는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네 가지 의례가 전하는 메시지를 연결하면 이렇게 된다.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기원하기 위해 함께 모여 놀고 먹고 즐기는 행위. 축제를 열고, 명절을 지내며, 제사를 올리고, 고사를 치르는 문화적 이벤트는 오직 인간만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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