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하길

듣는 이들은 위대하다

by 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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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선배 가운데 ‘말(馬)’ 전문가가 있다. 그의 말투는 약간 어눌하다. 눈빛은 저녁놀을 떠올리게 한다. 약간의 물기가 고여 있고 마주보는 상대방이 괜히 미안해지거나 서글퍼지게 하는 눈빛이다. 물론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의 성격은 유순하기 짝이 없어 가끔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역시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의 직업은 기자였다. 기억하기에, 유능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일간지에서 사회부, 문화부를 거쳐 레저부로 갔고 마지막으로 경마장 담당기자가 됐다. 경마장의 경주 일정을 소개하고 유망한 말과 다크호스를 예측하는 기사를 썼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가 예측하는 말이 우승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2년, 3년, 5년… 그는 경마장에서 가장 핫한 기자로 명성이 쌓여 갔다. 소문에 따르면, 말의 눈빛과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기자라나.

어느 날 저녁, 거리에서 선배와 마주쳤다. “요즘 평안하시죠? 경마장 구경 한번 시켜 주세요.” 부탁했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어, 글쎄다. 나 곧 명퇴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입은 웃고 있었는데 눈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아, 수 년 전 방문했던 선배의 집이 떠올랐다. 넉넉지 않은 형편, 몹시 아팠던 형수, 선배를 닮은 아이들, 오만 가지 상념이 순식간에 지나쳤다.


얼마 뒤 전화가 왔다.

“나 경마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개업할 때 오렴.”

경마장에서 판매하는 정보지를 만든다는데, 생각해보니 이미 정해진 길이 아닌가 싶었다. 그로부터 불과 3년도 안돼 그는 놀라운 사업가가 됐다. 그가 만든 정보지가 경마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간다는 것이다. 선배의 게슴츠레한 눈, 어눌한 말투, 유순한 성격… 말과 닮은 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람은 자기와 닮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그가 말하는 것 같았다.


2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 갈 때, 세미나나 토론회에 참여할 때, 가끔 이런 고민을 한다. 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참 말을 많이 한다. 물론, 하는 이보다 듣는 이가 많다. 듣는 이보다 하는 이가 많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너무 시끄러울 것이고, 말귀를 알아듣기도 힘들 것이며 말의 원래 목적인 소통이 안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세상은 말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듣는 이들이 이끌어 가는 것 같다.

듣는 이들은 위대하다. 그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고, 스스로 바꿀 자세를 갖추고 있다. 반면에 말을 하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받아들이기보다는 강요하길 즐기고, 스스로 바뀌기보다는 바꿔놓으려 애쓰는 이들이 많다. 듣는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너무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게, 애매하지도 않고 고집스럽지도 않게, 너무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게 말하기란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3

두 종류의 말. 앞말은 말:이고 뒷말은 말~이다. 그런데도 가끔 헷갈리는 말들이 있다. 말이 말 같지 않다는 말도 이 말이 그 말인지 저 말이 이 말인지 모르겠다. 세계 각국의 말들이 뒤범벅된 요샛말도 마찬가지이고, 세계 각국의 동식물이 뒤범벅된 환경 체계도 마찬가지로 '뭥미?'라 묻게 만들곤 한다.


흥미롭기도 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말이야말로 사람의 말을 가장 정확히 알아듣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역사와 가장 오래도록 함께 해왔고, 지구 곳곳에서 수천 년 동안 벌인 전쟁터를 함께 누빈 이들이 말인 것이다. 별것도 아닌 인간들의 욕심을 위해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던져 온 말들. 주장하지 않고, 듣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말들을 보면 신비롭고 존경스럽다. 체격이 작은 것도 아니고 머리가 모자란 것도 아니고 인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우리끼리는 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말들을 척척 들어주고 기꺼이 달려주는 이유, 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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