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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Dec 08. 2021

그리운 고향의 도서관으로 보내는 편지

Letters to Library


<그림과 치유> 프로그램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수업에 대한 요청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모국에서 영어를 함께 사용했어도 한국에서 수십년을 사는 동안 잊고 지내 온 선생님들이 영어 그림책으로 배우는 회화 수업을 요청하면 개설하는 식이었다. 적어도 2주에 한번, 어떤 달은 매주 수업이 열렸다.


초보자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수세미 뜨개로 시작해 지금은 모자, 가방 등 뜨개질로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까지 뚝딱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선생님들의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보통 수업을 2~3시간 진행되다 보니 뜨개질을 하는 동안 지금의 고민과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아무리 애써도 실타래처럼 엉키고 섥힌 여러 관계들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모두가 집에 갇혀있던 2020년 2월에는 집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규모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대구와 가까웠기에 여파는 더욱 컸다. 처음엔 금방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주가 지날 때마다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사실이 되어가면서 수업을 온라인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여든이 다 된 선생님들도 화상채팅 어플을 깔아서 접속해 근황을 확인할 정도로 누군가와의 친밀한 연대가 그리웠던 시기였다.


그림책 제작을 미뤄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 먼저 브레인 스토밍을 시작했다. 하루는 수업을 하다 "어제 남편이랑 애가 거실에서 치킨 시켜 먹고 나는 안 불렀어요. 내가 방에 있었는데.."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 진짜 속상하셨겠다! 나가서 왜 나는 빼놓고 둘이 먹냐고 뭐라고 하시지!" 명랑한 톤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별 거 아닌 이야기 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혼이주여성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원가족에서부터 시작된다.


한참 사춘기에 방문을 쾅쾅 닫으며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를 외쳤던 철부지였기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부채감이 든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못하는 말이 없는 6살 아이를 키우며 다가 올 사춘기가 벌써부터 겁나는 엄마가 되었다.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과 소통이 안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내가 엄마와 겪었던 갈등과 해외결혼이주여성이 겪는 갈등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다문화여성을 위한 한글 교육이 무료로 지자체에서 열린다 해도 시간을 내서 센터까지 가서 꼬박꼬박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차가 곧 발인 지역에서는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버스로는 1시간을 돌아 돌아 가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가지거나 집안일 이나 밭일 등으로 바쁜 경우가 상당수다. 


언어를 학습하는 것에는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필수다. 외국어에 노출이 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지나면 생활에 필수적인 소통은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는 전문적인 수업과 학습의 시간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수십년을 해외에서 체류해도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를 꽤 많이 목격하는데 특히 집 안에만 고립되어 있는 여성들의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집 안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다 보니 현관문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큰 장벽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30년을 살았어도 원가족 안에서도 고립될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언어의 문제가 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는 이들은 소수다. 숙련된 언어를 사용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당장 우리가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언어 교육을 실행할 여건은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언어의 문제만 해결되면 끝나는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소통이 원활해질 수는 있겠지만 매일 얼굴을 봐도 가장 모르는 존재가 가족 아니던가.


결혼이주여성, 다문화 가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고 보았을 때 저마다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개인의 면면들이 드러났다. 필리핀이 고향인 엘사 선생님은 바나나 나무가 한 가족 정도가 아니라 한 마을을 구성하는 씨족 사회를 먹여살린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장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바나나가 필리핀에서 많이 열린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 나무가 어떤 존재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깝고 친숙한 나라의 이미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나는 이토록 무지했다는 걸 발견했다.


언어는 살아있는 감각이라 매일 쓰지 않으면 녹슨다. 알파벳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외우는 apple 사과의 스펠링도 헷갈릴 때가 있다. 처음 배낭여행을 떠나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길가에서 한국어로 대화하는 무리를 보자 반가워서 "여보세요"라고 한 적도 있었다. 고작 열흘이면 자동 반사적인 "안녕하세요"의 감각을 잊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데 우리는 주어를, 목적어를, 부사를 찾지 못해 오랜 시간 서로를 탐구했다. 손짓, 발짓 때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래 내가 말 하려고 했던 게 이거 였어!'를 찾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뷰를 통해 그림책에 들어갈 텍스트를 정리하면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구글과 핀터레스트를 이용해 그리고 싶은 이미지를 찾으면 출력해 유선지를 대고 따라 그리면서 각자의 집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코로나가 주춤하던 5월에는 그림 선생님을 초빙해 연습한 그림에 걸맞는 재료의 특성을 배우고 1:1로 스케치와 채색에 대해 코칭을 받았다. 크레파스, 수채 색연필, 펜 등 다양한 재료들로 각자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는 것에는 확실한 기준과 컨셉이 필요했다.


책의 시작점에서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지점을 표시하고 마지막 장에는 지금은 한국에 모여 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미지를 통해 엄마,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수식어 속에 가려있던 개인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운 고향의 도서관으로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컨셉을 잡으면서 실제 고향의 도서관 주소를 구글링해서 넣고, 나를 소개하는 짧은 글을 쓰는 동안 누구보다 고민했다. 유년 시절의 사진을 찾으면서 고향의 원가족들이 앨범을 뒤져 '그 땐 그랬지' 추억을 소환하며 눈부신 순간들을 함께 공유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엄마도 이런 호시절이 있었어. 정말 예쁘지? 이렇게 사랑 받으며 자라온 기억이 있어." 가족이라고 불리지만 매일 본다는 이유로, 말할 시간이 없어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이런 여러 이유로 잘 모르는 대상이 가족이다. 이 책을 통해서 엄마의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기를. 엄마가 가진 고유한 문화와 역사가 책으로 네 아이에게 또 네 아이의 아이에게까지 전해지기를. 그런 바람으로 Letters to Library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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