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히 애써서 식기세척기를 쓰겠다는 다짐을 통해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식기세척기는 오랜 염원이었다.
물 한 잔 마신 컵이면 바로 물로 헹궈 건조기에 엎어 놔도 좋으련만. 그렇게 쌓인 컵을 설거지하기 전의 준비 의식이 늘어났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컵을 찾아내는 게 1번, 설거지 타임을 함께 할 유튜브 영상을 검색해 싱크대 앞에 세팅하는 게 2번, 기름이 있는 것과 없는 식기를 분류하는 게 3번, 귀찮아도 고무장갑을 착용하는 4번까지. 비로소 설거지를 시작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식기세척기를 생각했다.
설거지는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의 단면이었다. 뽀드득 소리, 가지런하게 정돈 된 식기 건조대를 바라 볼 때면 뿌듯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설거지는 좋아하지 않는 것의 목록에서 부동의 넘버 원을 지켰다. 가게로 바쁜 어머님이 저녁 늦게 귀가하시는 터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근처에 사시는 아버님과 대부분의 저녁을 함께 한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하원을 직접 할 때는 아버님이 주로 우리집에 오셨고, 아이가 유치원 버스로 등하원 하기 시작하면서는 우리가 아버님 댁으로 가기 시작했다.
시댁에서의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면 2차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다. 미뤄도 되는 일들은 기어코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게 만든다. 할부 60개월, 렌탈 식기세척기 같은 전단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수기랑 비슷한 개념일 수 있겠다. 한 달에 치킨 1.5마리만 아끼면 되겠다. 나름의 합리화 회로를 반짝이면서 말이다. 식기 건조대 사이즈의 미니 식기 세척기를 눈여겨 보다 냄비가 걸렸다. 결국 그 놈의 냄비 때문에! 빌트인 싱크대의 장 일부를 들어내야 하는 큰 식기세척기를 들이게 되었다.
처음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서는 해방이라 생각했다. 싱크대 개조라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예산은 올라갔으나 이왕이면 큰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막상 그토록 바라던 식기 세척기를 집에 들였건만 의외로 편하지 않았다. 세척기에 넣기 전에 애벌 세척을 하고 세척 후에 잔여물이 남은 냄비를 다시 세척해야 했다.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는 손맛을 당해낼 재간이 어디 있겠냐만은 움푹한 한국 식기의 특성을 간과했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은 드물다지만 일종의 배신감이 밀려왔다.
식기세척기를 쓸 만큼의 설거지 양이 아니어서, 어차피 냄비는 내가 또 닦아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식기세척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서 멀어져갔다. 그토록 바라던 식기세척기를 옆에 두고 설거지를 하는 꼴이라니. "내가 빨리 해버리는 게 낫지" 급한 성미에 못이겨 수세미를 들고 있는 내가 식기세척기에 투영되었다. "싫은 소리 하니 내가 하는 게 낫지", "굳이 이 말을 해서 뭐하나" 내 기준에서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다른 이들을 '당연하지'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도 우유를 냉장고에 넣지 않는 남편과 음료수로 진득해진 컵을 장난감 통에 같이 쑤셔넣는 아이나. 차곡차곡 쌓인 분노가 폭발하면서 그제서야 드러나는 그 감정을 마주할 때 "아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엄마의 기분 탓'으로 흘려버릴까. 돌이켜보면 '호르몬 때문에 엄마가 이상해졌다'라고 표현하는 엄마의 갱년기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날뛰는 호르몬이 문제였을까? 오랜 세월 눌러 놓기만 했던 감정의 방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건 아니었을까?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게 아니라 더 이상 참지 않겠노라는 선언은 아닐까?
사용의 횟수나 실효성 보다 식기세척기는 내가 마련한 작은 해방의 지점이었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무수한 일들 중 하나를 내 선택으로 덜 수 있다면 기꺼이 택하겠노라는 다짐이었다. 무언가를 부탁하면서 어렵고 아쉬운 소리, 싫은 소리 하는 게 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모든 걸 내가 다 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도 연습은 필요하다. 그 때는 괜찮아 보여도 사실은 괜찮지 않은 부스러기들이 쌓이고 쌓여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들이받기 전에. 완벽하지 않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도 분산시키고 내보낼 수 있어야 그 다음 스텝이 열린다.
부단히 애써서 식기세척기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통해 지금 나의 상태를 진단한다. 내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시간이 지연되고 미숙한 부분이 있어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하면 금방 처리할 수 있는 것도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식기세척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옆에서 멍을 때릴 지언정, 훗날 쓰임 받지 못해 녹 쓴 기계를 보며 후회하는 건 내 몫일 테니까.
내가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을 분리할 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에서 조금씩 파이를 나누어 누군가를, 무언가를 키우는 다른 일에 쏟아 부을 것. 생산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멍이라도 때리라고. 그 대상이 아이던 회사던 결국 나 혼자서 모든 몫의 책임을 다 하려고 애쓰는 부단함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는 연습을, 시간을 그렇게 터득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