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윤동주 <서시>를 차용한 1월의 그림일기 완주 감상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아이는 어느새 벌써 그림일기를 그리고 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처음에는 한글 통문자학습을 할까 원리학습을 할까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언젠가부터 혼자 기차역을 읽었고, 휴게소를 읽었다. 책을 많이 읽어주지도 못했지만, 책을 더듬더듬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곤 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렇게 큰 만큼 나의 시간도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듯, 자꾸만 내몰리듯 흘러갔다.
1월,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보기 위함이었을까. 정애님의 그림일주그림일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일기도 오랜만이지만, 그림일기는 더더욱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졸라맨으로 형상화되는 상형문자 수준의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게 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장면을 하루의 기억으로 남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남기는지에 대한 것은 언제나 인류의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 인류 중 나는 글과 그림 중 항상 글을 선택하는 종이었다. 글은 확실하게 보이는 것들을 오히려 모호하게끔 만들 수 있었고, 그게 좋았다. 빈약하나마 상상력에 의거해서 누군가의 모호한 글을 확실하게 읽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내 글을 보면서 그렇게 추측하는 것.
그렇지만 그림은. 그림은 일단 모호한 것들을 뚜렷하게 시각화한다는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거부감이랄 것도 없는 게, 그건 아주 사소한 수준의 거부감이었는데 사실은 내가 시각화해내고 형상화해내는 그림 수준이 정말 참담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모호한 것들을 뚜렷하게...? 오히려 더 모호하게 구현해내는 손그림의 수준을 보면 기분이 오묘했다.
미술시간에 C, C+을 도맡아 담당하던 사람들은 알 거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완성된 것이 내 손에서 참담하게 무너지는 것을 관조적으로 구경할 수 있게 되는 순간들. 그 순간에 어머 난, 똥손이구나. 하고 자기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그런 내게 그림을 그리는 정애님은 거의 EBS의 밥 선생님이나 다름없는 금손이었다. 참 쉽죠? 하고는 슥슥 그려내는 사람의 손은 혹시 나와 다른 신경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나 싶어 몇 번 뚫어져라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다 그런 나의 아이가 어느날 어린이집에서 그림일기장을 받아와서 숙제라면서 한 장 한 장 그려나가는 것을 보면 여간 대견한 게 아니었다. 다소간의 끄적임과 화려한 채색은 요즘 감성은 물론 아니었지만, 아이의 성장이 켜켜이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특별해서 꾸깃한 일기장을 내가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아이의 그림일기는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림일기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 장소, 음식 등은 다 아이의 취향을 담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닮아 그런가,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 자신이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자신의 눈으로 본 것.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 위주로 그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이의 그림일기에서 ‘엄마’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엄마랑 치킨을 먹었다.
엄마랑 미술학원에 갔다.
엄마랑, 엄마랑.
그림일기 속에서 느껴지는 뚜렷하고도 절대적인 아이의 사랑을 느끼면 나는 정말 세상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고픈 것이었다. 오롯한 절대자의 신뢰도 이처럼 나를 정신차리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이의 그림일기 속에서 나의 말이 등장할 때면, 가끔은 부끄러웠다. 내가 저런 말을 했지, 참. 때로는 아이는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런 그림일기를 그리나? 할 정도로 괜히 감동이 치미는 기억도 있었다.
그건 나의 그림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다양한 나의 일상을 그려야지, 했는데, 점점 회사에 대한 불만, 출퇴근의 힘듦, 이런 것들이 삶에서 누적되기 시작했다. 회사원이 느끼는 불만과 부당함, 로또되고 싶다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 날마다 똑같은 불평을 하자니 너무 맥빠지는 일이었다.
그림일기의 장점은 그것이었다. 내가 오늘 하루 싫었던 일이나 별로였던 것들을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해서 그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재생하는 것만도 벅찬 하루 속에서 결국은 내가 가장 즐거워하거나 좋아했던 일을 억지로라도 찾게 됐다.
그림일기는 내게 곧, 감사일기나 다름없었다.
점진적으로 결국은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 위주로 그려지는 그림일기가 되었다. 엄마라서 어쩔 수 없던 거였다던가,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덕질하는 한 명의 팬 같은 느낌으로 내가 하루에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그렸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있던 시간,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누린 경험, 처음으로 해보는 너의 순간들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시선들. 처음에는 오랜만에 잡는 연필이 너무 어색하므로 아이의 뒷모습을 그려댔으나,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것은 역시 아이의 표정이었다.
한 번은 아이의 머리를 자르고 거하게 망쳐서 아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표정을 그렸다. 볼수록 사랑스러운 그림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모호하지 않고 뚜렷한 마음이 드러난 그림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이는 그림일기를 계속해서 그려나가기로 했고, 나도 2월도 계속해서 그림일기를 그리기로 했다. 아이는 처음에 엄마의 그림일기를 보고 뭘 그려? 하다가 이제는 내게 소재를 달라는 수준에 이르렀다.
엄마, 엄마 뭐 그릴 거야?
나는 오늘 밤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들을 보며 생각한다. 서로의 사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러브장에 가까운 그림일기를 보면서.
너의 그림일기 속에 등장할 수많은 사람들 중 최초라는 영광을 가지게 된 엄마는
엄마의 그림일기 속에 등장하지 못할 많은 잎새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노래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엄마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그리하여 너에게 불 바람을 전부 다 막아줄 수는 없어도,
반드시 총총히 빛나는 별 하나로 남아주고 싶다고.
p.s 그림일기에 매번 코멘트를 달아주는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과, 나의 그림일기 선생님 정애님께도 항상 감사드린다. 일기는 그야말로 사적인 영역이지만, 그런 사적인 표현을 계속하라고 독려해주고 보아주는 이가 없다면 사실은 흐지부지됐을 것이다. 계속해서 나날과 나날들의 표현에 질문을 던져주던, 독자를 자처하는 고마운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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