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다음으로
달력만 보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울한 기운이 올라온다.
분명 수술 후 3개월이면 충분할 거라 했는데.
그쯤이면 모든 것들이 회복되고, '에피테제'라는 인공 보형물의 제작이 진행되어 금방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수술을 마친 지 여섯 달. 예상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상상도 못 한 임파선 전이에, 의사 선생님들의 예상과도 어긋난 부작용과 후유증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선생님, 에피테제 제작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안와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야 하는데, 염증과 진물이 이렇게 계속되면…"
희망을 가지고 싶다.
내일을 기대하고 싶다.
"지금 상태로라도 어떻게 안될까요? 한없이 기다릴 자신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흠... 이렇게 시작한 사례는 없지만, 일단 제작 업체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몇 주 전까지는 마음의 그늘이 너무나 짙어서 다음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고, 자꾸만 최악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고만 생각했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글도 쓰며 얹힌 감정을 풀어준 덕분일까. 이제는 다음으로 가게 해 달라고, 도와달라고 애원할 기운이 생겼다.
'에피테제'의 세계는, 눈꺼풀암이나 안와내용물제거술만큼이나 좁고 폐쇄적이다. 손, 발, 유방 같은 부위의 인공 보형물은 수요가 많아 세계 각지에서 제작되고 있지만, 얼굴—그중에서도 눈꺼풀을 포함한 안와부 에피테제('외장의안'이라고도 불린다)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은 일본 안에서도 몇 곳뿐, 세계를 통틀어도 셀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자세한 제작과정이나 사용 후기 같은 정보도 없다.
드물다, 희소하다… 이제는 그런 말도 놀랍지 않다. 그저 전문가를 믿고 따르는 수밖에.
"원칙적으로 에피테제는 피부가 완전한 상태에서 주치의의 허가를 받아 제작을 시작합니다. 현재 상태는 좋지 않지만… 주치의 선생님이 특별히 요청해 주셨으니, 최대한 접착제 사용과 자극을 조심하면서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제작 기간 6개월 동안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전제하에 말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잘 좀 부탁드릴게요."
"오늘 바로 본뜨는 작업을 시작합시다."
오른쪽 눈의 반창고와 거즈를 빼고 눈구멍을 비운다.
작은 접시같이 생긴 금속 받침대에 소량의 접착제를 바르고, 가운데 오목한 부분이 눈구멍에 들어맞도록 안면에 부착한다.
오목한 부분에 점토를 채운다.
왼쪽 눈과 대조하며 오른쪽 눈을 조각한다…
"요즘은 3D프린터로 금방 만드는 곳도 있는데, 저희는 주변 피부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얇고 정교한 형태로 제작하기 때문에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할 겁니다. 장시간 앉아 있는 게 힘드시겠지만, 함께 잘 만들어 봅시다."
10분, 20분... 한 시간. 말이 인공 보형물이지, 정교한 미술작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일과 다름없는 작업이다.
왼쪽 눈을 그대로 복사한다고 생각하니, 쉽게 눈을 감을 수도,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이내 숨이 거칠어졌다. 에피테제 기공사(技工士) 역시, 조각칼을 번갈아 쥐며 숨 고를 틈 없이 움직였다. 그의 숨소리도 점점 짧고 거칠어졌다.
의뢰한 사람도, 제작하는 사람도 쉽지 않은 시간.
'슬픈 얼굴로 만들어져서는 안 돼.'
작업하는 내내 좋은 생각만 떠올렸다. 무척 만족스러운 에피테제의 완성, 제법 자연스러운 얼굴, 본연의 밝음을 찾아가는 나...
"거의 끝나갑니다.
근데, 참… 크고 깊은, 예쁜 눈이네요. "
힘주어 뜨고 있던 왼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런 눈인데.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눈인데. 그 눈을 잃어서 이렇게 다시 처음부터 만들고 있어요, 기공사님. '
"이삼 개월에 한 번씩 앞으로 두 번, 오늘과 같은 작업을 할 겁니다. 왼쪽 얼굴의 상태가 중요하니까,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요. "
다음 만남은 이삼 개월 뒤. 그리고 완성은 6개월 뒤.
며칠 전,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던 날 밤,
지금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이삼 개월 뒤에 내가 있기는 할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있어야겠다.
아직 내가 모르는 것들, 느끼지 못한 것들,
다음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