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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시험

지지 않아

by 모모


꿈을 꿨다.

새하얀 빛이 눈부셔 두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꿈.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눈 하나를 제거한 뒤로, 몇 번이고 같은 꿈을 꿨다.

사라진 눈을 향한 그리움인가. 혹은 미련.


신기한 일이다.

같은 꿈에서 깰 때마다, 두 눈이 온전히 붙어 있는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다시 눈을 감곤 했었는데—

조금씩 운동도 하고 글도 쓰며 마음을 다잡은 덕분일까. 오늘은 '그래, 이게 지금의 나였지'라고 담담히 받아들여 본다.



마음이 회복되니 몸도 따라오는 걸까.

몸이 나아지니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단 며칠 사이,

진물을 쏟아내던 안와의 피부는 놀랄 만큼 말끔해졌고,

평생 달고 살아야 할 것만 같던 눈 주변의 통증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눈보다도 신경 쓰였던 안면 마비는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옅어졌으며,

미각도 제자리를 찾아서 이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동안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괜찮아?'라는 질문에 '응, 괜찮아'라고 웃으며 답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많이 좋아졌어.'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미뤄뒀던 연락들에 하나 둘 답장을 보내고, 산책을 겸한 점심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맛있어 보이는 가게를 골라 식사를 한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커피도 마신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내 눈과 건강을 집요하게 묻는 사람은 없다. 안부 몇 마디 후에는 예전처럼 일상의 이야기들이 오간다. 내 눈이 두 개였을 때와 다름없이.


'달라진 건 없어. 암이 나에게서 뺏아간 건 눈 하나뿐이야.'



회사의 직속 상사와도 식사 약속을 잡았다. 기약 없이 기다려 주고 있는 회사에 이제는 소식을 전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대로 회복이 이어진다면 복직도 먼 얘기는 아닐 테니까.


"생각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네. 정말 다행이다. 생활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어?"

"네, 부장님. 오른쪽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튀어나오면 놀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조금씩 적응하고 있어요. 복직할 때에는 붐비는 시간대를 피해서 출퇴근하면 큰 문제없을 것 같아요."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상병 휴직 기간도 아직 남아있고, 회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몸만 허락한다면 꼭 돌아와야 해.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두컴컴한 새벽 세시 반.



이상하다.

아프다.

뜨겁다.



눈이 떠졌다.

누군가 내 머리를 잡고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대 보니 오른쪽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급한 마음에 진통 소염제를 먹고 버티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긴 대기 끝에 연결된 병원에서는 '지연성 부작용'이 확실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방사선 부작용이 나타나거나 반복되는 증상. 별다른 치료법이 없으니 며칠 쉬어 보고, 염증이 심해지면 방사선 치료 중에 처방받았던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라고 했다. 이것도 저것도 임시방편. 과연 현대의 의학기술로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한 병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오후로 넘어가면서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방사선 치료를 받았던 오른쪽 얼굴과 목 전체에 울긋불긋한 반점이 올라왔다. 반창고가 붙어 있는 부분은 더 빨갛고 더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반창고를 잡아 뜯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누런 진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원점이다.

부장님과 마주 앉아 앞으로의 나를 그리며 이야기를 나눈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게 나오고, 그게 끝나면 끝난 줄 알았던 게 다시 시작되고… 암이 끝없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거 같아서, 그게 가장 괴로웠어. "


수술을 앞두고 있던 나에게, 2년 전 자궁암 수술을 받고 겨우내 건강을 찾은 친구가 해 주었던 그 말, 그대로였다. 암은 아파서 힘든 게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서 힘든 거다.


그놈의 리셋.

끝없는 시험.


그래도 몇 번 겪다 보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오기가 생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버텼는데.

분명 또 몇 번이고 나를 시험할 것이다. 기대하면 어김없이 방해하고, 이겨내서 안심하면 또 다른 산을 또 내밀겠지.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지지 않을 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넘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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