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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대 (2)

겹겹이, 더 선명하게

by 모모


예상치 못한 커밍아웃이었다.


수술을 위한 휴직을 앞두고 회사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던 날, 항상 밝은 성격으로 분위기를 띄우곤 했던 선배가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큰 수술이라 마음이 안 좋겠지만, 다른 건 다 접어두고 건강만 생각해. "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눈과 눈꺼풀 적출은… 피할 수 없다고 했었지?"

"... 네.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지금은 그게 최선인 거 같아요."


"그렇구나... 실은 말이야, 나… "


정적.


그리고,

말보다 공기로 먼저 스며드는—


묘한 동질감.





"사실은, 나도 이쪽은 가짜 눈이야. 의안.

어릴 때 일찍이 실명됐고, 중학교 때 받았던 검사에서 음영이 보인다고 해서 적출했어."

"아…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말인데, 눈 하나를 잃고 나면, 세상에 나만 이런 것 같고 모든 게 다 싫어질 수도 있어.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마.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고, 희망을 발견해.

눈을 적출한 뒤의 삶은, 병원도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더라.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




지긋지긋한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

피부는 불붙은 돌덩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가— 랙 걸린 영상처럼 몇 번이고 같은 과정을 되풀이했다. 처음에는 피부 상태에 휘둘려서 일희일비하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오기가 생겨서 이를 악물고 버텼고, 나중에는 잦은 짜증에 지쳐 무뎌진 연인처럼 그저 덤덤해졌다.


'또 시작이네.'


무신경하게 연고를 바르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 문득 멈춰 섰다.


방사선을 어디에 비췄는지 지도처럼 드러내던 오른쪽 얼굴의 염증은, 이번엔 빈틈없이 번지지 않고 듬성듬성 얼룩처럼 끊어져 있었다. 염증이 피어오를 때마다 눈구멍을 축축하게 적시며 흘러나오던 누런 진물도, 이제는 진물 탱크가 바닥난 듯 바싹 말라 있었다.


계속해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제자리에서 맴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몸은 리셋이 아니라, 아주 느린 회복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을—


내가 인정하지 않고 있던 것뿐이었다.

나는 하나 남은 눈까지 꼭꼭 가린 채, 회복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밀어내고 있었다.






2개월 만의 정신과 상담날이다.

정신과 상담은 남편의 권유로 시작된 일이었다. 안와내용물제거술의 내용과 날짜가 정해졌던 날, 남편은 수술 자체보다도 앞으로의 내 마음이 더 걱정된다면서, 병원에 정기적인 멘털 케어를 요청했다.


그 이름도 거창한, 암 전문 병원의 '종양 정신과' 카운슬링. 처음에는 과 이름이 참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정신과면 정신과지, 굳이 종양이라는 낙인을 덧붙일 필요가 있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악성 종양을 몸에 품어 본 자만이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잔잔한 공감과 반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번에 몸이 안 좋아서 카운슬링을 한 번 연기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네, 실은… 피부 부작용이 심하게 올라와서 일정을 한 번 바꿨어요. 다 나은 줄 알았던 부작용이 다시 반복되니까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많이 힘들더라고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운동도 하고, 일기도 쓰고, 그렇게 쓴 글을 인터넷에 연재하기도 하고... 요즘은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SNS에서 저와 비슷한 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서 말도 걸어보고 있어요.

한시라도 부작용과 후유증을 잊으려고 분주하게 지내고는 있는데…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이에요."


주로 내 이야기에 덤덤하게만 반응해 오던 심리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입을 뗐다.


"보통은 수술 후에 무기력한 상태가 이어져서, 버텨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하는 데에만 몇 달, 몇 년이 걸려요.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다시 우울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방금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셨어요. 무언가에 집중하면서 힘을 내고, 또 다음은 무엇을 할지 기대하는 건강한 루틴이 생겨난 것처럼 보여요. 이건 정말 좋은 변화예요. "



또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나는 텅 빈 마음 바구니에 작은 기대를 하나 둘 주워 담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걸.


희미한 기대를 겹겹이 쌓아서 선명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그 기대를 알아채서 희망으로, 다시 의지로 바꾸어 가는 것도—



결국은 나다.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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