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인다는 이유로
“2025년 한 해도 잘 지내셨죠?”
방송에서 흘러나온, 흔한 연말 인사.
한껏 부풀어 있던 눈물 풍선을 바늘로 콕 찌른 것처럼, 왈칵 눈물이 터졌다. 한참을 그랬다. 울고 또 울다, 더는 짜낼 것도 없는 마른행주 같은 모습이 되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1월 16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던 암 선고.
그날을 시작으로 암 전문 병원으로의 전원, 눈 한쪽의 제거, 한여름 내내 이어진 방사선 치료, 끝없는 부작용이 줄줄이 이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없었던 일처럼, 아주 말끔하게 오려내고 싶은 이천이십오 년.
그래도 남은 게 없는 건 아니다.
따뜻한 위로와 응원, 걱정, 말, 그리고 사람.
이 일 년 동안, 나는 평생을 통틀어도 다 받지 못할 만큼의 위로를 받았다.
— 내가 아는 너는 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 눈이 둘이든 하나든, 모모는 모모야.
— 우리는 언제라도 기다릴 거니까, 네가 다시 일할 수 있을 때 언제든지 돌아와.
…
나의 몸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
몸만큼이나 마음을 염려해서 하는 말,
앞으로의 일과 육아, 삶에 대한 조언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현실적이었던, 한마디.
“장애 인정도 받고, 누릴 수 있는 건 당당하게 누려.”
몸의 불편함, 장애로서의 인정,
그리고 혜택.
그 사이에는 분명하고도 무거운 경계가 있다.
한국의 시력장애 인정 기준은 마치 서바이벌 경기 같다. 기본 전제는 '두 눈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는 비교적 시력이 '나쁜 눈'과 '좋은 눈'만이 존재한다.
‘장애’의 범위에 들어오려면, 먼저 '나쁜 눈'이 교정시력이 0.02 이하—거의 보이지 않아 형태•명암 위주로만 인식하는 상태여야 한다. 동시에 '좋은 눈'마저 0.3 이하—거리감, 안정성이 무너지는 수준일 때, 비로소 경증 시력장애로 인정된다. 불편한 눈이 아니라, 멀쩡한 눈의 유무로 판단하는 방식.
눈이 두 개였을 때 들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이야기가, 눈이 하나뿐인 지금은—내가 겪은 상실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너무한 거 아니야?"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흥분한다. 나보다 더 아쉬워한다. 그래서 나는 미리 선수 쳐서 스스로 마다하는 척을 하곤 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진짜 필요한 사람들이 누려야지."
내가 살고 있는 일본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일본에서는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의 구분으로 시작한다. 눈 하나를 실명한 경우, 남은 눈의 시력이 0.6 이하—단안으로 인한 거리판단 오류와 사고율이 증가한다고 보는 수준이 되면, 시력 장애 6급으로 인정된다.
엄격하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눈을 잃은 사람을 고려하려는 흔적이 조금은 느껴진달까.
마음으로 와닿는 결은 조금 다르지만, 결론은 같다.
하나 남은 눈이 아직 건재한 나는 어느 나라에서든 '비장애인'이다.
나에게 일찍이 눈 하나를 잃고 의안을 쓰고 있다고 털어놓았던 회사 선배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배님. 이런 상황에 놓이고서야 알게 됐어요.
한쪽 눈을 잃는다고 해서 장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
"맞아, 눈 하나 없는 걸로는 부족하지.
근데… 나는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었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취직 활동을 할 때, 운전면허나 각종 자격증을 취득할 때에도 구차한 설명할 필요 없이 '평범한' 출발선에 설 수 있었거든.
이제는 남은 눈의 시력도 나빠져서, 원하면 장애 인정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 없어. 이유는 잘 모르겠어. 그냥… 그러고 싶어. "
미처 알지 못했다.
불편함과 장애의 경계에 선 사람의 진심을.
혜택보다도 장애로 확정 짓는 시선과 낙인이 더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도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건너가지 못한 채, 하나 남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보인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상실을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