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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쓰담 Feb 24. 2023

할머니와 잔치국수

며칠 전부터 아이들에게 예고한 대로 저녁에 국수를 먹기로 한 날이었다. 국수 하나 먹는데 뭐가 이리 비장해서 예고까지 하나 싶겠지만 잘 먹는 아이들이어도 음식에 대한 평가는 단호박이라 그렇다.


우리 아이들에게 '국수'란 삶은 소면 간장을 베이스로 설탕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이다. 집에서 멸치로 국물을 우려 잔치국수를 몇 번이나 시도했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러다 정착한 것이 간장비빔국수다. 면을 좋아하는 첫째 크다는 물론이고 밥을 좋아하는 둘째 작다도 제법 먹는다.



"국수 해 먹을까?"

어머님께서 갑자기 국수 얘기를 꺼내셨다.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매번 시도할 때마다 아이들이 먹지 않는 상황을 대비해 밥도 항상 같이 준비한다고 덧붙였다. 정성 들여 끓여주신 국수를 아이들이 먹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면 어쩌지.



아이들은 새로운 음식을 먹으면 주먹을 높이 들고 주먹 위아래를 바꾸는 나름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다가 멈춰서는 엄지를 위로 척 올려 세우거나 아래로 내린다. 음식에 대한 즉각적인 아이들의 평가이다. 전에 먹었던 음식이라도 새로 했다면 동일하다.


아이가 퍼포먼스를 취하는 시간이 길진 않은데 음식을 한 사람 입장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음식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을 거다. 엄지가 아래로 내려가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째야 할까. 며느리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아득해진다.




결전의 그날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저녁 메뉴는 국수라고 한 번 더 예고하고 어머님께 문자 드렸더니 답문을 주셨다. "어휴 가기도 전에 긴장되네ㅋ"

 너머로 어머님의 긴장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 성향도 아시고 며느리가 미리 예고를 한 탓에 더 긴장하셨을 거다. 너무 겁을 드렸나 싶었지만 상황을 무심코 넘겨버리기엔 며느리는 너무 걱정쟁이였다. 아이들은 맛 평가에 관대하지 않다. 기준은 오롯이 '본인들 입에 맛있는지'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멸치 육수를 우려서 미리 국물을 준비해 두셨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오면 면이 불지 않게 따뜻하게 준비해서 식탁에 내어주실 생각이셨다.



"우엑, 무슨 냄새야."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들이 집 안 가득 퍼져 있는 멸치 육수 냄새를 맡고 말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려나 싶어 걱정하던 차에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멸치 육수 냄새지~"


미리 준비한 육수를 다시 따뜻하게 데워서 한 그릇 뚝딱 만들어서 내어주셨다. 한 젓가락 먹어보더니 아이들은 어김없이 주먹을 위아래로 요리조리 움직인다. 긴장됐다. 절로 침이 삼켜졌다.


"맛있어요!"

아이들이 지를 들어 올렸다. (세상에!)


"그래에~?"

어머님도 기분이 좋으신지 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맛있다며 잘 먹던 크다가 다음에 또 해달하니 기분 좋게 '그러자'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더 주세요!"

크다의 말에 어머님도 나도 휘둥그레졌다. 면을 더 담아줬다. 아이 그릇이지만 거진 두 그릇을 먹고도 밥을 한 숟가락 더 뜨는 아이가 신기하고 대견했다. 그러고도 바나나를 또 먹겠다고 해서 남은 한 개를 반으로 나눠줬다. 크다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바나나 하나 다 먹고 싶은데 없어요?"


딸내미야, 오늘 식성 머선 일입니까..ㅋㅋㅋㅋㅋ




엄마와 할머니는

크다가 어린이집에서 담근 김치가 맛있다고 하고

머니와 크다는

마가 전한 진미채가 맛있다고 하고

아이와 엄마는

할머니 잔치 국수가 맛있다고 하고


3대가 도란도란 단란하게 는 시간이 좋았다.

아이에게도 어머님께도 이 순간이 오래오래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다음날 아침에도 크다는 국수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나보다..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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