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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쓰담 May 11. 2022

골뱅이쫄면과 증여

일찍 마쳤다. 한 달에 두 번은 회사에서 한 시간씩 일찍 보내준다. 참 좋은 회사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늘근 시닙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요일부터 미뤄왔던 골뱅이 쫄면을 먹는 날이다. 배가 계속 아팠는데 먹고는 싶었어서 며칠 참느라 힘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한 시간 반 걸리지만. 그런데 문득 하지 못한, 그래서 해야 하는 일이 생각났다.



한 달 반 전에 퇴사를 하면서 퇴직금을 받았다. 계열사 이동이라 퇴직금을 옮겼어도 됐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갑자기 목돈이 생길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냥 받고 싶었다. 무엇에 어찌 쓸 생각도, 계획도 없었지만. 남편에게 물어는 봤었는데, 사실 동의를 구했다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마음은 정했고, 그에 따른 계획을 공유했다고 표현해야 정확하겠다.



주식 공부를 시작은 했는데 막상 종목을 분석하고 언제 사야 하고 언제 팔 건지 등을 정하는 건 못한다. 계속 빠지고 있는 시점이라 지금이 줍줍 기회인 거는 같은데, 느낌이 그럴 뿐 확신이 없어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받은 퇴직금이니 그저 막연하게 식으로 굴려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다. 어떻게 해볼까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증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세상에, 내 생에 증여라니'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웠다. 샌드위치였던 날에 아이들 증권 계좌를 만들고 냅다 이체를 했다.



증여신고는 3개월 이내에 하면 된다며 남편이 이래저래 방법을 찾아줬다. 근데 나, 늙었나 보다. 온라인으로 하는 것보다 세무서 가서 직접 신고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세무서로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날이 좋아서 낮맥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부럽다'는 생각 1초, '조만간 낮맥하고 싶다'는 생각 1초, 그리고 또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서울은 따릉이가 많은데, 자전거를 못 타서 몸뚱이가 고생한다. 따릉이 타는 사람들 사이로 뽈뽈뽈 열심히 걸었다.




"이 서류 작성하시면 되고, 예시는 여기 있어요." 하시면서 여기에 이렇게, 저렇게 쓰면 된다고 직원분이 부연설명을 해주셨다. 사람도 없는데 번호표 띵똥을 바로 안 하길래 '여기 일 안하는구만'했는데 막상 설명은 또 친절하게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적어 내려갔다.


수증자/증여자 모두 주소를 써야 했다. 아이가 둘이라 주소를 네 번이나 적었다. 주소 도장을 하나 파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꾹꾹 눌러 적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여긴 왜 안내도 안 해주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셨다. 2층에 있다고 말씀드리니 "어떻게 올라가냐, 다리가 불편하다"면서 또 고래고래.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해드리고 나니 그제야 가셨다. 공무원들의 진상 민원을 잠깐이나마 체험한 느낌이었다. 곱게 늙어야겠다.


필요하다는 서류를 다 챙겨갔는데 신청서 말고는 받지도 않는다. 굳이 주시겠다면 첨부해서 신청해주시겠다는 느낌이다. 가져온 거니까 첨부해달라며 주섬주섬 챙겨서 드렸다. 영락없는 아지매였다.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게 끝나서 어리둥절했다. 사실 세무서라서 긴장하고 갔는데 막상 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괜히 긴장하고 걱정했나 보다.


일단 뭐라도 한 걸음 떼어서 기분이 좋다. 앞으로 잘해야겠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 시작이 반이면 좋으련만.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거는 이미 알고 있기에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잘했다, 기특하다.




아, 맞다. 내 골뱅이쫄면.

지하철 타고 오면서 세상 치열하게 고민하고 주문했다. 그런데 고민이 너무 길었나 보다. 아직도 배달시간이 50분 남았단다. 집이 도착하자마자 먹는 완벽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건 실패했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골뱅이쫄면을 먹는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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